019,6,16, 주일강론
본문 : 고전15:50-58
말씀 : 라인권목사
어제가 낮이 연중 가장 긴 하지였습니다. 오늘부터 낮이 짧아지게 됩니다. 낮은 일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빛이 있을 때 주님처럼 일해서 성장하는 여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그 신령계 천국에 적합하게 부활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하십니다. 이렇게 혈과 육이 천국을 받을 수가 없다면, 부활의 날까지 혈과 육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재림 나팔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죽어야 사는 것이 생장의 원칙이라고 했지요. 죽음이 부활의 몸을 입게 합니다. 이렇게 죽음이 새로운 삶, 부활의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의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 이 혈과 육을 벗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냐는 겁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는 살아 있는 자들도 죽었다가 부활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육의 몸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육의 몸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느냐? 그 방법은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밀이라는 것은 신비에 속해서 잘 모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변화되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변화시켜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밀이라는 것은 이 “신비”에 속한 것을 “계시”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시로 살아있는 혈과 육이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순식간에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이 육신을 성화시켜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는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51-53)
이 사실은 우리 성도들의 딜레마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입어 구원을 받았어도 죽음을 맞습니다. 죽음이 죄의 형벌, 죄 값이라면, 주님의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죽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도에게 죽음이 있습니까? 그것은 성도에게 마지막 원수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육의 몸을 성화 시키는 하나님의 징계, 구원의 수단이며,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날까지 살아있는 성도는 마지막 나팔소리에 홀연히 죽음을 경험케 하여 완전 성화를 이루시고, 부활의 몸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구원의 마지막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부활의 영광을 입게 하는 알아서 죽음을 새로운 삶의 방법으로 확신하시를 축복합니다. 이 확신으로 죽음 앞에 평화를 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일말의 의심도 없는 부활의 확신
이렇게 사도 바울은 부활을 계시로 알았기 때문에 이 부활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썩을 것, 이 죽을 것” 이 말씀은 육신의 연약성과 비천성, 임시성이라는 육신의 한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도가 이 썩을 것이라고 했을 때에 이는 누구를 지칭했을까요? 사도는 자기 육신을 지칭했을 것입니다. 내 이 육신은 썩고 죽을 것이다. 이 육신과 부활의 몸을 대조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대조로 육신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고, 이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로 육신의 연약함의 한계, 죄와 육신에 구애됨이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계시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에는 의심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확고부동합니다. 확신만 넘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소망으로 육신을 살고, 이 세상을 저 부활의 세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부활이라는 마지막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서 죽어도 살 자라면, 이 사도의 확신이 우리의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죄의 몸을 가지고 있어도 이 확신으로 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몸을 바라고 삽시다. 우리가 비록 괴롬과 죄가 있는 이 세상을 이 육신으로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 이 영광의 몸으로 살 것을 보고 삽시다. 우리는 죽을 자가 아니라, 이 죽을 자가 주님과 같이 다시 살고, 주님과 같이 영화롭게 될 사람임을 확신합시다. 이 확신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함
따라서 이 부활의 소망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55절-57절은 시입니다. 시는 노래이지요. 이 노래는 승리에 벅찬 감격에서 울어 나오는 승리의 개가입니다. 왜 이런 노래가 막 나옵니까? 첫째, 사도는 재림 때에 이루어질 부활을 계시로 현재인 것 같이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재림 나팔 소리가 울려옵니다. 이 나팔은 시내산에서 보듯 하나님의 임재의 선포입니다.(출19:16) 하나님의 임재는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이지만 원수에게는 심판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사망과 사탄을 멸하시고 부활의 몸을 주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려 다시 오십니다. 이 재림 나팔소리는 이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를 불러 모으는 소리며, 그 소리에 따라서 무덤 속에 있는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나오고, 살아 있는 성도가 그 나팔 소리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 되어 주님을 영접하여 그 후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있게 됩니다. 이게 마지막 구원입니다. 이걸 내다보니 벅참 승리의 개가가 막 울어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는 이사야의 시에 대한 화답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날을 내다보며 노래했습니다. 사25:8을 봅시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이 예언은 계20:14의 일을 미리 본 것입니다. 주님이 사망과 음부를 불 못에 던지신 결과로 “사망이 다시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이 구속의 성취를 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예언만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지금 우리까지 모든 성도들이 한결같은 염원이요, 소망이요, 위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계를 보며 환난을 견디고, 고난과 핍박을 기뻐하고, 세상의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 소원! 이 소망이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사야가 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 날에 이사야의 예언과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보며 감격에 넘쳐서 이사야의 시에 화답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노래했습니다. 희열이 넘치고, 감격이 넘칩니다. 이 희열과 감격으로 이 부활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 노래합니다. 이 시는 엄숙한 사망선고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희랍신화의 독침을 쏘는 괴물을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괴물 사망에게 정복되지 않는 대상이 없었지요? 군왕도 재상도, 부자도, 영웅도 다 죽여서 정복하고 이겼습니다. 이 사망 앞에서 “야! 고양이 있으면 나오라고 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큰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사망을 비웃고, 사망에 사망선고를 하고, 사망을 짓밟고, 사망을 폐기처분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게 술 취한 고양의 허풍입니까? 공허한 장담입니까? 아니지요. 사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쏘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요? 사망이 쏠 수 있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은 쏠 수가 없습니다. 이 죄는 율법의 정죄 때문에 효력을 가집니다.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 순종과 성취를 요구하고 그 요구는 사람을 죄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죄 값이 사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행과 대형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용서 받아서 정죄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망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능력으로 사망을 폐기처분하고 이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도의 삶의 능력
여러분 이렇게 사망 앞에 사망을 폐기처분하고 승리의 개가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것이 사도바울의 삶의 능력이었습니다. 이걸 우리가 앞에서 보았지요. 30-32을 보세요, 부활로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날마다 죽었습니다. 세상유혹을 이기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이걸 부활의 권능이라고 합니다. 이 감격, 이 감사! 이 찬양이 질병이 와도, 가난이 와도, 환난이 와도, 죽음이 와도 넘친 것입니다. 이것이 살게 했습니다. 즉 구원이 되게 했습니다. 이 능력으로 살려가는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가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이 부활의 세계가 아니라, 세상의 형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져다 합시다. 그래도 결국 죽습니다. 부활이라는 구원이 없으면 다 소용없고 망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아야 합니다. 구원 받아 부활의 소망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부활의 확신과 소망만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이 세상을 살아내고, 살려가는 삶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승리입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제 부활장 강해 끝에 왔는데 이 확신, 이 감사와 찬양, 이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고 있으십니까?
이달 유월, 첫 주에 저희 집안에 경사와 초상이 한 날에 났습니다. 큰집 장형 형수가 제 조카 딸 혼인날에 돌아가셨습니다. 형수가 난소암이 온 몸에 퍼졌습니다. 이년 가까이를 항암 하다가 5지난 5월에 넘어져서 대퇴부가 부서져 위독해졌습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제가 병원에 심방을 했습니다. 거기서 요14:1-3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 말씀을 읽어 드리고 간단하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했는데, 처음 들어갈 때 인사에도 반응이 없던 형수께서 울면서 큰 소리로 ‘목사님! 저 천국가게 해주세요!’하셨습니다. 제가 이 소리 듣고 속으로 할렐루야! 했습니다. 정말 구원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천국 보내는 건 전문가입니다, 롬10:9,10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천국가기에 충분한 믿음이라는 것을 단 한 한마디로 설명했습니다. 장례를 지낼 때에 목사님 다녀가시고 어머니가 평안해지셨다는 것이 조카의 고백입니다. 저는 그분 분명이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죽음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심판이 없습니다. 죽어도 삽니다. 우리 몸이 죽지만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성화의 수단입니다. 재림나팔이 울릴 때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 은혜로 가족은 이 감격과 감사와 찬양으로 사망을 폐기처분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꼭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 꼭 다시 살자와 같이 삽시다. 이 감사와 찬양으로 썩을 것을 썩지 않는 것을 살려가는 삶으로 부활의 날을 보시게 되고,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는 날 이 감사와 찬양을 주께 드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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