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21, 부활절
본문 :고전15:1-2,11
말씀 : 라인권목사
복된 부활절에 부활의 평안이 우리 은혜로 회중에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앤더슨 암센터에서 세계적인 권위와 명성을 얻는 김의신박사가 MBC창사 40주년 기념강좌에서 행한 강연을 듣다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게 현대의학이 사람을 2백 살까지 살 수 있게 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5천년까지 살수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무두셀라가 969세를 살고, 칠팔백, 구백세를 산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모순- 영생을 염원하며 부활을 믿지 못함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번 죽는 것이 인생이지만, 인류는 여전히 영생을 염원하고 영생하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불로초를 구하기도 했고, 지금도 뭐가 몸에 좋다! 한 번 방송 나오면 난리가 납니다. 이렇게 인류는 영생을 추구합니다. 이런 인류에게 부활은 복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생을 염원하는 인류가 오히려 부활을 못 믿고 비웃습니다. 영생을 염원하는 인류가 부활을 못 믿습니다. 이게 인류의 모순이며,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모순되고 웃기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즉 영생을 염원해서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이지요. 영생! 이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니 어쩌니 하며 부활이 없다고 부활을 부정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12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렇게 고린도 교인 중에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사람, 이런 교회에 부활이 어떤 것이지를 가르치려고 붓을 든 것이 오늘의 본문 고전 15장입니다. 그래서 본장은 부활장이라고 하지요.
부활 복음의 본질이자 기독교신앙의 본질
그런데 이 부활장의 첫 부분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부활을 가르치려고 하셨기 때문에, 사도가 부활이라는 말로 본문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부활이라는 말로 본문을 시작하지 않고 복음이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부활을 알게 하겠다가 아니라 “복음”을 알게 한다고 복음으로 시작합니다. 왜 바울사도는 부활을 가르치려 면서 부활이 아니라 내가 이미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알게 하겠다고 복음과 전파된 복음으로 부활 장을 시작하고 있을까요?
복음은 곧 부활
이것은 무엇보다도 바울은 복음을 부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활은 복음의 일부분입니다. 생애도, 사역도, 십자가도 있고, 장사도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을 알게 하겠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게 하겠다고 하신 것은 부활을 복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부활이 복음이요, 복음은 부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부활입니다.
부활 복음 즉 기독교의 본질
그리고 바울이 복음은 부활이다. 부활을 복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이 사역하시고,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해도,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가 되시고, 십자가의 죽음이 효력을 가져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부활에 서있습니다. 복음은 이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하고 여전히 무덤 속에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독교의 가르침, 전파는 다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애초부터 부활을 전함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즉 ‘내가 지금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에게 전하고 가르친 복음을 알게 하려한다.’ 고 합니다. 나 바울이 애초에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이냐? 그게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게 모든 사도들의 전파였습니다.(11) 이렇게 애초부터 이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 이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 사도들이 전파한 그대로 받아서 믿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믿어 구원 받는 성도가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적 증거
첫째, 이는 전파되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계신다는 현재적 부활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한번 상상해봅시다. 어느 날, 고린도에 키 작은 한 사나이가 들어와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파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목수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구주가 되셨다! 이분이 그리스도, 메시야다!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이렇게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파할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행18:6)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잡아 재판에 회부 하려고 했습니다.(행18:12,13) 이 대적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복음을 대적하고 반대했어도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사신 것을 믿었습니다.(11) 이게 왜 가능했습니까? 예수께서 살아계신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다시 살았다는 것은 사기다. 예루살렘에 가봐라! 무덤 속에 나사렛 예수의 시체가 있다! 이러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못합니까?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빈 무덤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것도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이 전한 대로 받아드리고 믿어서 구원 받은 것도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믿어지고 실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애초에 복음을 전할 때에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드리고 믿을 수 있고, 실제로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느냐? 너희가 내가 전한 대로 믿은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실제로 너희가 믿을 때에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냐? 내가 전한 복음으로 그대로 믿고 구원을 받은 너희가 예수님이 지금 현재 살아계신 현재적 부활의 증거가 아니냐?’ 이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살아계시기 때문이며, 지금도 이 복음을 믿고, 믿을 때에 실제로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는 기적이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이 지금 현재 부활의 증인이요, 현재적으로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부활의 증거인줄로 믿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 은혜로 가족이 부활의 살아있는 기념비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은 사람에게 나를 봐라!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아니냐?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느냐? 구원 받은 내가 예수님이 살아계신 증거요, 증인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구원이라는 영적이 실제가 있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 부활절이 이 영적인 실제가 있도록 부활의 주님이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서는 것이 부활의 현재적 증거
따라서 애초에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대로 믿었다는 건, 지금 현재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요,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부활의 현재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곧 부활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행2:32,36,4:2,10) 이 복음의 전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땅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지 못했다면 이 복음전파가 가능합니까? 우선 예루살렘에서 불가능하지요. 사도들이 전파할 때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오면 끝납니다. 이걸 못해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사를 보면 교회는 피를 먹고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3백 년 동안 로마가 교회를 박해하여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복음과 교회가 쇠퇴하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이 시절이 기독교역사에서 복음의 능력이 가장 찬란하게 나타난 때였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OMF선교사들이 철수했을 때에 중국교회는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키신저의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이 걷혔을 때에 선교사들이 다시 중국에 가보니 중국교회는 수 천 배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지금 북한 땅에 70년 가까이 핍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핍박은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도 북한에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 부활의 현재적인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이 선교하게 하고 부활이 선교를 이루게 하고 부활이 교회를 서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선교의 능력입니다. 부활이 교회가 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부흥의 능력은 부활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전하고 선교하고 교회를 세워 현재적 부활의 증거가 되는 부흥을 축원합니다.
구원 이후의 구원으로 삶이 현재적 부활의 증거
그리고 구원 이후의 기독교인의 구원의 삶이 부활의 현재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2절을 봅시다.“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의 구원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 천국백성이 되는 구원을 말합니까? 천국에 가는 것,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지요? 이 구원은 성화구원입니다. 이 삶을 구원하는 성화가 무엇으로 됩니까? 이것을 바울은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굳게 지키는 믿음, 헛되게 믿은 것이 아니라, 바로 믿는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저는 이를 실제적으로 보여준 것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이라고 믿습니다. 고린도교회인 중에는 사도의 사도 권을 부정하고, 분쟁하고, 심지어 음행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복음, 즉 부활을 바로 믿었다면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내세가 있다는 거지요. 거기서 진짜 본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있다는 것은 거기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대로 영원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예배를 자기의 신앙을 과시하는 진열장으로 만들 수 있고, 이것을 믿는 사람이 편을 갈라 분쟁하고, 이것을 믿는 사람이 간음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게 다 부활이 없어서 “오늘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하는 사람들에게나 있는 현상이 아닙니까?(32)
그러므로 부활을 바로 믿는 것, 부활의 소망이 분명한 것, 이 부활의 능력이 구원 받은 성도로 하여금 삶을 구원하는 성화를 이루게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삶이 변화되는 것이 부활의 증거라고 하십니다. 죄가 끊어지고, 육신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라고 하십니다. 우리 구원 받은 성도가 세상을 이기고 천국과 천국의 상 주심을 바라며 구별되게 천국으로 사는 삶이 지금도 부활의 현재적 증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은혜로 가족여러분! 인류는 모순덩어리입니다. 영생을 원하며 부활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 구원 받은 우리 은혜로 가족은 살아있는 부활의 현재적 기념비들입니다. 다음 주일에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이 세상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이러면 먼저 베드로가 내가 증인이다, 라며 증인석에 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가 나오고, 오백여 형제들이 출두하고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내가 증인이라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증인석이 세울 수 없습니다. 이때에 현재적이며, 최종적인 부활의 증인으로 설 사람이 바로 우리가 전한 대로 믿은 너희가 현재적이며 최종적인 부활의 증거와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1-2절의 결론인 11절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전한 대로 믿어서 구원 받은 너희가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현재도 살아계신 증거요 증인이다. 이제 너희가 ‘내가 예수님이 살아계신 부활의 증거다’며 증인석에 나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자신을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적 증거로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이 확신으로 세상이라는 증인석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이라는 증인석에 섰을 때에 우리가 죽어도 사는 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꼭 죽을 사람같이 보인다면 부활의 증거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살 사람입니다. 꼭 죽을 자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살 자 같이, 살 자로 살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거가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이 없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는 가치관의 세상에서, 부활의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과 죄와 자신을 이기고 구원하는 삶으로 천국으로 사는 것을 보게 합시다. 이 구원의 삶이 영생을 원하면서도 부활을 부정하는 이 세상 앞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게 하는 증거가 되고, 부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부활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시고 함께 걸어주셔서 이 세상 앞에서 분명하게 살 자로 살자 같이 살아 부활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강 론 >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을 만든 부부 (0) | 2019.05.22 |
---|---|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0) | 2019.05.05 |
“시온의 딸아 기뻐할지어다!” (0) | 2019.04.07 |
하나님의 소망, 우리의 소망 하나님! (0) | 2018.12.30 |
구유에 뉘신 구세주 (0) | 2018.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