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12:1-4
말씀 : 라인권목사
지난주일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 믿음의 시작을 공부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된 내력
오늘의 본문은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게 되었는지, 그 믿음의 내력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세였더라”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게 된 내력을 정리해보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인간의 응답
첫째 아브람에게 이 하나님의 부름이 있기 전에는 그는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아브람이 우상을 섬기는 있는 중에 하란의 죽음을 계기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여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 왔지만 이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런 상태에 있는 아브람을 어느 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말씀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 이렇게 불러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아브람이 그 나이 칠년오세에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편의 반응, 또는 응답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이 선행 함
이 사실이 무엇을 증거 합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것은 그가 믿어보려고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 주시고 불러 주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람의 믿음은 아브람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믿음은 사람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구도나, 사유나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당신을 나타내 주시고 불러 주시는 은혜로 시작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을 구원으로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 부르심을 통해서 한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이 일어나게 하는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같이 자신의 구원 사건이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은혜로 부르신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갈1:15) 그러면 믿음에는 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행해야 합니까?
왜 부르심이 선행해야 하나
그것은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신뢰와 의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반으로 믿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무슨 말입니까? 결혼을 예로 봅시다. 결혼하기 전에 왜 데이트 합니까? 상대를 알기 위해서지요. 결혼은 상대에게 자신의 인생을 상호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겨도 좋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를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알 때 그를 신뢰하여 자기 인생을 의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믿음이란 내 인생과 영원한 행복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 의탁이 이루어지려면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야하고,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야만 비로소 마음 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되는 믿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 아이들이 어릴 때에 부흥회를 하면 아이들을 할머니께 맡겼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다음 월요일에 데리러 가서 제가 마당에 들어서면 딸애가 두 손을 들고 마루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대로 달려 나오면 마루 끝에서 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달려가서 받았습니다. 아빠에게 마음 놓고 맡긴 겁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신뢰가 가지 않는 것,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보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므로 마음 놓고 자신을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이 선행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로 나타내 주셔야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알아서 마음 놓고 자신을 의탁하는 인격적 신뢰라는 믿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종교와 다른 우리 여호와 종교의 믿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 받을 사람을 아브람을 불러 주신 것 같이 부르심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면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임하는 것인지, 이 부르심의 특징을 아브람의 부름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믿음과 구원으로 한 사람을 부르시나
첫째, 아브람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정하심, 예정을 따라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람을 친히 부르셨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름이 예정과 선택을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게 왜 하필 아브람만 부르셨느냐는 겁니다. 데라도 있고, 나홀도 있고,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중에 아브람입니까? 이게 선택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 선택이 우연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먼저 일하시기 전에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을 작정이라고 하고, 이 작정이 개인에 적용될 때 예정과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한 것입니다.(갈1:15) 부르심 자체도 은혜이지만, 이 은혜 이전에 이 선택이라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선택이라는 은혜를 기반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 받을 사람을 은혜로 부르시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아브람을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히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먼저 당신과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보이셨다는 뜻입니다. 말씀하는 당사자가 먼저 임해야 말씀 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스데반은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셨다”고했습니다.(행7:2)“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12:7)“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15:1)라는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활동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주시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시기 전에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 비로소 아브람이 이 계시에 믿음의 응답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구도나 사유의 결과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이시고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
이렇게 우리가 믿으려면 이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친구와 같이 대면하여 이야기 한 모세도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엎드리게 하고 등만 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출 33:23)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육신적 존재가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를 본 자가 없습니다.(요1:18)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았다,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 보여”이 말씀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영광과 권능과 은혜로우심과 거룩하심이 한 인간 아브람을 부르심에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하나님의 영광, 권능과 거룩하심과 큰 은혜가 압도적으로 나타나서 한 인간 아브람이 은혜에 압도되어서 하나님 존재와 그의 크심을 인격적으로 느끼고 그 앞에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때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지요. 이때에 베드로가 주님의 신성에 압도되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예수 앞에 엎드렸습니다.(눅5:8) 왜요? 이 놀라운 이가 한 낱 어부에 불과한 자기를 찾아주시고, 보잘 것 없는 자기에게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 주시는 은혜에 압도 되어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크심과 그 행하심의 찬란하심과 큰 은혜에 압도 될 때에 인생은 비로소‘당신은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이렇게 엎드려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이셨다는 뜻이요, 이게 하나님을 보았다.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친히 내 삶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기도 하시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압도적으로 보이신 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과 그 구원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크심과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한 사람의 죄인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나타내셨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은혜에 압도 되어서“그는 거룩하시다!’고 엎드려 경배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보이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앞으로 와서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아시려고 하시고 성경을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 즉 계시를 받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심은 아브람이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는 큰 은혜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은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거절할 수 없게 부르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아브람이 부름을 받을 때의 나이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떠난 것이 그 나이 75세 때입니다.(12:4)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아브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갈대아 우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지난 강해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창15:7절과 행7:1-4입니다. 이 해석을 따르면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와서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우르 소명설의 문제점
첫째, 이 해석대로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불가항적인 것이 못됩니다. 왜냐면 그 부름은 우르에서 하란까지만 순종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총신에서 구약을 가르친 김희보목사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지 못한 것은 늙은 아버지 데라를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이 부르셔도 그 부르심의 은혜라는 것이 인간의 윤리와 도덕, 인정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은 즉각적이고도 분명한 헌신과 순종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형제가 부름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들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4:18-22) 이게 효력 있는 부르심, 불가항적인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이렇게 아브람도 하란에서 하나님이 부르시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름은 이렇게 불가항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 그 부름은 효력 있는 부름, 불가항적인 부름이 못되는 겁니다.
둘째, 아브람이 우르에서 부름을 받아서 나왔다면 아브람이 주도적으로 우르를 떠나야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데라가 주도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창11:31) 셋째, 무엇보다도 아브람이 우르에서 부름을 받은 거라면,“아비 집을 떠나”라는 창12:1의 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람의 순종은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비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아비와 함께 하란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르에서 부름 받고 하란에서 재 부름이라면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구속력이 없는무의미한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 계신 집을 떠나는 것은 아무런 부담과 시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아비 집 떠나라는 것은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말씀을 하신 격이 됩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우르에서 부름 받은 거라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찬양 할 때 쓰는“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아브람의 믿음과 순종은 별거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 데라는 60년을 더 살았습니다. 데라가 아브람을 70세에 낳았고, 아브람이 75세에 부름 받았으니, 이 때에 데라의 나이가 145세가 됩니다. 그리고 데라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면, 데라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간지 60년만에 죽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일과 델리취와 같이 아브람이 우르에서 부름 받고, 하란에서 데라가 죽은 후에 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데라가 죽기 전에 하란에서 부름을 받아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믿음의 결단과 순종을 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절 할 수 없는 불가항적 은혜의 부르심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아브람이 우르가 아닌 하란에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길게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이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섭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 받았다면 부르심의 은혜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간의 한계, 인정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과 인정이란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 어떻게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부름은 효력 있는 부름이 못 되는 겁니다. 인간의 윤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우르가 아닌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이 비로소 아브람을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의 은혜는 아브람으로 윤리와 도덕과 인정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게 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름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늙은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은 아브람의 나이가 75세나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구축한 모든 삶의 토대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게 한 강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람을 효력 있게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형제들은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고,(마4:20,22) 마태는 세관에서 즉시 예수님을 따른 겁니다.(마9:9) 그래서 이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넷째, 우리 하나님은 아브람을 친히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고 불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내가 네게”“내가 너로”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람에 친히 말씀하시고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을 구원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을 하나, 하나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독생 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을 효력 있게 하시려고 때가 차면 미리 정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친히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이렇게 나를 위하여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울의 감격이었습니다.
부르심 받은 은혜의 복됨
따라서 이렇게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즉 계시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주시고 말씀으로 불러 주셔야 인간은 그 하나님께 응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엡2:8)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즉 믿음은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선택되고 부러주신 사람만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운 중에 행운입니다. 믿는 이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 받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하나님의 이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믿음의 확실성이 있습니다. 믿음을 내가 시작했다면 나는 인생이기 때문에 한계에 직면하고, 데라와 같이 결국 하란에 머물고 하란이 무덤이 되고 말 것 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내가 아니라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빌1:6)이렇게 사도 바울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 주권적인 은혜로 믿음을 완성하실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은혜로 부른 이가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이루는 그 날까지 결코 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한 인생인 우리를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벗이 되기까지, 우리의 믿음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우리는 앞으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확인해 나갈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 받아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이렇게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감격을 영국의 도도릿지 목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영광의 주 늘 섬기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은혜로 가족여러분! 저는 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는 믿음은 결코 하란이 무덤이 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주장해 나가고 누리는 믿음이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복음의 부르심에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응답할 시간입니다. 이 시간, 아브람처럼 믿음으로 자신과 영원한 장래를 하나님께 의탁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인생을 출발 합시다. 그리하여 이 복된 삶으로 나를 부르신 은혜의 감격을 고백하고 기쁨으로 찬송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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