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 11:27-32
말씀 : 라인권목사
이월이 가고 삼월이 되었습니다. 내일 모레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입니다. 이런 시절을 아가서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 어여쁜 자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이제 우리도 이 말씀과 같이 떨치고 일어나 금년에 우리가 기경해야 할 사명의 밭을 기경하러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걸음을 격려하기 위하여 새로운 강해를 준비했습니다. 본래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강해하려고 준비해 왔는데 이 강해가 초신자들에게 어려울것 같아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강해하기로 했습니다.
믿음을 하는 두 가지 방법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배운다면, 여기서 왜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배워야 하느냐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공부하기로 하고 오늘은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믿음을 시작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성과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하나는 인간이 이성과 의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자력신앙 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타력신앙, 즉 은혜라고 하고, 계시 의존 신앙이라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창 11:27-32절은 전자에 속하고, 창 12:1-4절은 후자의 방법 즉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방법입니다. 이 두 방법 중에서 어느 방법이 옳고 하나님의 방법이냐? 이걸 분명히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창 12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1장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자력 신앙의 한계를 분명히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를 간단히 소개하고 데라가 갈대 아인의 땅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란에 이르러서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결국은 그 하란에서 죽어 거기 장사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왜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가?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할 문제에 직면합니다. ‘왜 데라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리가 흔히 바벨로니아 문명이라고 부르는 수메르 초고의 도시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운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르는 요즘으로 말하면 뉴욕 같은 곳이라면, 가나안 땅은 그에 비하면 아프리카에 비견하는 지역입니다. 어디가 살기 좋고, 기회의 땅입니까? 당연히 우르입니다. 그리고 12:5에 의하면 데라와 아브라함은 많은 가속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데라 일가는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데라는 경제적 풍요에 목말라 아메리칸 드럼을 쫒거나, 또는 경쟁상대가 없는 블루오션(Blue Ocean Strategy)을 찾아 가나안 땅으로 이민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데라는 그 문명한 우르를 두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실들은 데라와 아브람은 더 이상 떡으로만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데라는 왜 더 이상 떡으로만 살 수 없게 되었을까요? 왜 데라와 우리 인생은 떡으로만 살 수가 없습니까?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인생
첫째 인생이 이 세상을 살다보면 물질이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 하는 때, 또는 일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것이 돈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 없는 분야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이걸 절감케 하는 곳이 법원입니다. 법원에 오는 모든 문제는 다 돈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다툼은 다 돈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이고, 모든 다툼이 이에 대한 탐욕에서 나온다고 하신 겁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돈이 좋은 겁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치료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퇴원시켜 보신 일이 여러분에게 없으시지요, 저는 있습니다. 저는 돈이 없어서 병든 여섯 살 난 어린 동생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참담한 마음으로 큰 병이 든 어린 동생을 병원에서 손잡고 걸려 나오는데 그 천진난만한 것이 오빠가 와서 저를 데려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돈이 무섭고 좋은 겁니다.
그러나 인생의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물질이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파보면 그렇지요. 돈 있어도 통증으로 잠들 수가 없습니다. 돈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지만 돈이 안 아프게 하고, 다 고칠 수 있습니까? 돈 있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물질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 물질이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 다는 걸 절감 하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 인생은 비로소 떡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데라와 아브람이 이렇게 물질로 해결 못하는 인생의 문제를 만났고, 그래서 더 이상 떡으로만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둘째, 인생을 살다보면 물질과 물질적 풍요가 평안과 만족과 자유와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부하면 행복할 것 같아서 부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 욕망을 전도자는 인간의 욕망은 바다와 같아서 모든 강이 바다로 가도 바다를 채울 수 없듯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벌을 만큼 벌고 모을 만큼 모았어도 그 돈과 부가 진정으로 자신을 채우지 못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침대는 사도 숙면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을수록 불안하고 자유를 잃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걸 절감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물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보려고 하지요. 제가 공부할 때에 알바로 책을 팔아 보았다고 했지요, 70년대 서울의 있다는 사람들이 읽지도 못하는 그 비싼-시골에서 땅을 살 수 있는 가격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사서 고급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었을까요? 우리 이천이 도자기의 고장이지요, 70년대에서 80년대 초가 절정이었습니다. 왜 도자기가 그때 번영했을까요? 일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졸부들이 있어 보이려고 도자기를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떡으로만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철학을 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을 합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알수록 무지해지고, 공허해지고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니체나 고흐 같은 사람이 나오는 이유가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공부는 끝이 없고 책을 쓰는 것은 피곤하게 만든다고 하신 게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떡으로만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있어도 죽음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에 물질은 아무런 위로와 소망도 되지 못합니다. 이걸 알면 떡으로만 안 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데라와 아브람이 이런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우르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잃은 상처
왜 사람이 이렇게 떡으로만 안 됩니까? 인생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죄로 하나님을 잃은 상처는 바다와 같아서 고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애2:13) 조그만 웅덩이는 채우고 메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오직 크신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하나님 알지 못했을 때 결코 평안을 몰랐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전도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전3:11)이것을 종교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종교심은 하나님이 내신 좋은 것입니다.(롬 1:20). 바울은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행 17:22,27)여러분! 지금 데라와 아브람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떡으로만 안 된다는 걸 절감해서, 이 종교심이 막 발동해서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라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계기
그러면 데라는 언제 어떻게 떡으로만 살 수 없게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우르의 편리하고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는 종교심이 발동하고 추구성이 일어났느냐는 겁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11장 본문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데라 스스로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나님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라와 아브람에게는 분명히 그렇게 가나안으로 갈 수밖에 없는 계기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힌트를 15:7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땅 우르에서 이끌러 낸 여호와라” 이 말씀과 행7:2-4을 근거로 흔히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우르에서 구원의 부르심으로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은 소명이 15:7의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중요한 구원의 부르심이 11장 때 있었다면, 성경이 왜 이 중요한 기사를 생략했겠습니까? 우르를 떠날 때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우르가 아닌 하란에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15:7은 12장과 충돌합니다. 오히려 행7:2-4은 수24:2-3의 "강 저쪽"이라는 표현 같은 대략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카일과 델리취는 이를 특별한 부르심, 즉 구원의 부르심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감독과 지도로써 이끌어 내심을 받은 것이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데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데라의 환경과 상황을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데라로 하여금 더 이상 떡으로만 살 수 없어서 참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는 계기,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막내아들 하란의 갑작스런 죽음
이 특별한 사건, 이 계기를 본문2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 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하란은 성경에 나온 순서대로 보면 데라의 세 아들 중 막내아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막내아들이 하란이 어린 자식 롯을 두고 아버지 앞에서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하나의 역사로만 보면 아주 건조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걸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본인의 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면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지요. 아버지 데라도 아브라함도 충격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하란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란이 죽게 되자 데라는 할 수 있는 걸을 다해 보았겠지요? 그 지역 주신인 나나에게 빌기도 하고, 용한 의원도 다 대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종교로도, 그의 돈도 의술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이때에 데라와 아브람은 비로소 인생이 떡으로만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을 겁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데라와 아브람으로 하여금 비로소 노아의 하나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시는 그 하나님이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는 노아 홍수 후 겨우 365여 년 밖에 안 된 때입니다. 이건 델리취의 해석입니다만, 총신에서 구약을 가르친 김희보 목사도 노아가 아브람이 어렸을 때까지 생존했다고 해석합니다. 계산해 보면 노아의 아들 셈은 아브라함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여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아브람이 어릴 때 노아가 생존했습니다. 그런데 데라와 아브람 일가들이 홍수 심판을 잊었고, 홍수로 구원하시고 심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긴 것은 충격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가나안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를 떠난 것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인간은 이렇게 쉽게 하나님을 잊고 버립니다. 죄의 본질을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21,28)
결국 데라와 아브람은 세상이 좋아 홍수와 바벨의 심판도, 그 하나님도 잊고 떡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 앞에서 갑자기 막내아들이 어린 손자를 두고 죽게 되자 비로소 그 하나님이 생각난 겁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야만 했을 겁니다. 그래서 데라와 아브람은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지성과 종교적 감정과 의지적인 노력으로 그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섬기려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구도의 노력으로 하란까지 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고난, 또는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인생의 연약함이 도리어 은혜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순간이 되면 무신론자도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직면하는 인생의 문제가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루이스가 인간의 고통을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한 건 옳은 깨달음입니다.
자력 신앙의 한계
그러면 이렇게 데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자력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던 구도의 시도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데라와 아브람의 그 종교심, 종교적 결단이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는 오게 했지만, 결국은 하란을 떠나지는 못하고 하란에서 머물다가 거기서 죽어서 하란이 데라의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하란은 참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곳입니다. 하란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입니다. 자력신앙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길에서 죽습니다. 길이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하란은 인간의 구도의 노력, 종교적 노력과 추구라는 자력 신앙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요, 하란의 데라의 무덤은 자력신앙의 한계의 상징이라는 것이지요.
첫째, 자력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노력은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만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데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란을 떠났을 것입니다. 데라와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왜 하란을 떠나지 못하겠습니까? 12장이 이를 분명히 입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심, 종교적 노력은 선한 것이지만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이성은 오히려 그 종교심으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만들고 섬기게 합니다.(롬 1:20-21)이게 아브람이 홍수 후 11세대에 불과한데도 우상을 섬겼던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부패한 인간의 이성과 추구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신 줄로 믿습니다.(고전 1:21) 신앙은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자력 신앙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막연하게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한 것이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삶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자력신앙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계시는 특별계시라는 구원계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믿음이란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 당신을 나타내 주셔야만 비로소 신앙이 이루어 지는 겁니다.
셋째, 자력신앙은 인간의 문화적인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란은 우르의 문명이 미치는 국경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데라는 그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불안했을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문화적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상 줄을 끊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문화적 영향, 세상 줄을 끊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아브람이 12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자 흔연히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이 이를 분명히 해 줍니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이 열려야만 비로소 도덕과 문화와 풍습에서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결국 데라는 한 사람으로 구도자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 어중 떼기 신앙을 상징하는 하란에서 머물다가 하란에서 죽어서 하란이 그의 무덤이 되어버렸다는 거지요.
하란 자력 신앙의 무덤
따라서 하란은 자력신앙의 무덤입니다. 하란은 계시라는 은혜 없이 시작한 자력신앙의 종점이요, 무덤입니다. 데라의 자력 신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 길에서 죽은 것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은혜 없는 자력 신앙은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하란으로 상징되는 길에서 죽고, 길이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구도라는 길에서 죽습니다. 구도라는 길, 하란이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계시의 은혜가 선행되지 않은 자력 신앙의 의지적인 노력으로는 세상과 육신의 줄을 끊지 못해서 하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없이 자력으로 하는 경건 운동도 결국은 하란이 무덤이 되는 겁니다. 자력 신앙은 다 하란에서 죽고 하란이 무덤이 되는 겁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
왜요? 자력은 육에서 난 것입니다.(요 3:3,6)즉 인간의 이성과 노력은 혈과 육에 속한 것입니다. 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고전 15:50)믿음은 인간의 자력이라는 혈과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영으로 됩니다.(요 3:5)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셔서 알려주시고 말씀해 주셔야 발생 됩니다. 믿음은 이 하나님의 나타나 주심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응답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바울 사도가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엡 2:8)그러므로 믿음은 자력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 종교심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당하는 특별한 환경과 사건을 계기로 하여 데라와 아브람 같이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은혜가 임했을 때에 사람이 자기의 이성과 종교적 열심만으로 하나님을 알고 만나려고 하면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선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한 인생이 어떤 계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을 때에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요, 죄로 인한 암매와 무력으로 하나님을 알수 없는 존재임을 겸손히 고백하고 자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투항해야 합니다. 구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직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 즉 인간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도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21)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된 하나님, 곧 예수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그 아들 예수가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셔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케 하셔서, 우리의 사죄 칭의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서게 하셨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생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요14:6) 그러므로 지금 내 인생에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면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내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려는 자력을 포기하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 갈보리의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이렇게 십자가 앞에 서는 것만이 구도로 그치고, 종교인으로 그치는 하란이라는 자력 신앙의 무덤 탈출하여 영생이신 하나님께 이르게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위에 계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성령으로 여러분을 불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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