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7,8주일강론
본문 : 창15:12-21
말씀 : 라인권목사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 같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못 견디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향해 광야를 가던 이스라엘이 왜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을 원망하게 되었을까요? 마음은 가나안 땅에 있는데 몸은 거친 광야에 있습니다. 마음은 가나안 땅에서 난 곡식을 먹는데 오늘도 만나를 먹어야만 합니다. 이 광야라는 현실이 이스라엘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이거 이러다가 가나안 땅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 거친 광야에서 죽는 것이 아닐까?’ 자꾸 불안해지고 두려워집니다. 지치고, 낙심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온 게 후회됩니다.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꼭 이렇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천국과 승리하는 풍성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마치 광야 같습니다. 마음은 예수님 닮기를 원하지만, 받을 사랑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변화 되지 않고 자꾸 넘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높은 뜻이 있지만 현실은 내 가족 돌보기도 버겁기만 합니다. 마음은 천국에 있지만 몸은 괴로운 세상에 있습니다. 이런 실정을 로지엘(lozier)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이게 현실입니다. 이 현실이 우리를 캄캄하게 합니다. 두렵게 합니다.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게 우리를 침잠하게 합니다. 이렇게 약속의 현실은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솔개를 쫒아야 하는 이브람의 처지
지금 아브람이 이런 실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큰 민족과 방대한 영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브람은 자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거하지만 발붙일 만한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게 아브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 약속에 도장을 찍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도 여기에 동의 하셨습니다. 피의 언약을 하시겠다고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짐승을 잡아 쪼개 마주 놓고 하나님의 불이 임하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오셔야 할 하나님은 해가 지도록 오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솔개나 쫒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 후의 아브람이 꼭 이런 처지가 됩니다. 아브람에게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12-16절은 이 어둠과 두려움을 보여 줍니다. 무엇이 아브람의 어둠과 두려움이었습니까?
아브람에게 임한 흑암과 두려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자리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애굽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약속을 이루는 무대가 아브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이 살 땅으로 가나안을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당연히 자기의 후손을 번성케 하시되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번성할 것으로 기대했을 겁니다. 이 가나안 땅에서 민족을 이루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직도 발붙일 곳도 없는 실정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가나안 땅이 아닌 애굽에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아브람에는 상서롭지 못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애굽은 가나안 땅과 같이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라 제국입니다. 가나안 땅의 텃세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대 제국 애굽은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기 자손이 이 애굽에서 살 것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지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둘째, 자손의 번성과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아브람의 기대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너는 정녕코 알라, 똑똑히 알라는 거지요,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그들은 사백년동안 너희를 괴롭게 하리니” 이는 아브람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가 되게 하시고. 노예라는 고난의 풀무에서 큰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아브람은 이런 방식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축복의 방식으로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종살이라는 고난의 방식으로 약속을 이루신다니, 이걸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집니다. 두렵기만 합니다. 침잠해지는 겁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데 소요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겁니다. 아브람이라고 자기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4백년입니다. 이 세월이면 이조 오백년과 맞먹는 긴 세월입니다. 더구나 이 사백년은 노예로서 고난의 세월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캄캄하게 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을 것입니다. 이상은 큰 민족, 나라요, 복음의 기관이지만, 현실은 노예입니다. 사백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이지 지금이 아닙니다. 이 간극, 괴리, gap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시험이 되었을 겁니다. 여기에 사탄이 틈타기 때문입니다. 지루하게 합니다. 이게 꼭 생일 먹자고 사흘 굶는 것 같이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의심이 일어나게 합니다. 축복이 아니라 노예로 4백년을 살아라, 하나님이 꼭 이런 방식으로 하셔야만 하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게 적잖이 낙심되게 하고, 침잠케 했을 겁니다. 그래서 카일과 델리취는 그날 저녁의 자연적인 어둠은 은혜를 거둔 것 같은 영적인 어둠과 두려움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솔개입니다. 사탄은 이 갭에 틈타서 아브람을 침잠케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캄캄함, 이 두려움을 쫓아내야 약속에 이를 수 있는 겁니다. 이걸 쫒아내지 못하면 약속을 주장하고 나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하나님이 임하시기 까지 따분하게 솔개를 쫒아야 했던 것 같이,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틈타는 이 시험이 되는 어두움과 두려움의 솔개를 쫒아내야만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이 요구되고, 믿음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떤 것인가? 이것을 배우기 위하여 우리가 동시에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 하나님이 이 어둠과 두려움의 솔개를 쫒아내야 할 아브람을 어떻게 다루시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긴 고난을 통과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은혜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조건 고난과 시련의 밤 사백년을 채우고 기다리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백년 고난의 시간을 알아서 견디라고 던져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기간의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 아브람이 틈타는 솔개를 쫓을 수 있는 비빌 언덕을 그 어둠과 함께 마련해 주시는 것을 본문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어둠과 두려움의 밤을 밝힐 수 있는 은혜 등대와 보루를 마련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현재적으로 누리게 하심
첫째, 그게 가나안 땅을 현재적으로 누리게 하시는 현재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이 열조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언약 땅의 축복이 장래 후손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아브람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사백년 이후에 아브람의 후손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어서 가나안 땅을 누리는 것과 다름없이 아브람이 지금 현재 가나안 땅을 누리며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땅 한 평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새 번역은 “그러나 너는 오래 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이 말씀의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해피 앤딩입니다. 동화의 행복한 결말이지요. 여러분! 이러면 아브람이 가나안 땅의 축복 못 누린 것 있습니까? 다 누린 것이지요?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만 비로소 그 땅에서 살 수 있고 그 땅을 누릴 수 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땅의 주인이 아니어도 주인이 된다는 약속을 믿고 그 땅을 주인처럼 살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얘 아브람아! 사백년 후에나 비로소 네 후손이 이 땅을 차지 할 것이지만 너 너무 서운해 하고, 요원해 하지 말거라! 이 땅을 사백년 후에야 네 자손이 차지 할 것이지만, 네가 믿음으로 이 땅의 주인으로 알고,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고, 이 땅을 주인처럼 누리며 살면 이 땅의 주인이 된 네 후손이나 너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네가 이 믿음으로 이 가나안 땅을 주인으로 살면 나 여호와가 현재적으로 너의 건강이 되고, 너의 공급이 되고, 너의 보호가 되어 이 땅에서 오래 오래 살게 해주마! 이렇게 장수하며 이 약속의 땅을 다 누리고 살다가 평안히 죽어 고히 묻히게 해주마! 그러면 됐지! 너 이것으로 위로 받고 시험하는 솔개를 쫓아내며 약속을 추구하라”이러신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가나안 땅에서 땅 한 평 없는 아브람이나 사백년 후 그 땅을 정복하여 기업으로 분배 받은 아브람의 자손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둘 다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있어도 나그네고 없어도 나그네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땅 한 평 없어도 가나안 땅을 내 땅같이 알고 살고 누리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된 축복을 현재에 누리게 복 주십니다. 이걸 언약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언약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면 언약의 복을 주십니다. 이 현재적 축복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축복으로 약속의 현재를 위로하시고, 틈타는 솔개를 쫓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여기서 비로소 이 믿음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발붙일 만큼의 땅 한 평 없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막에서 나그네로 살며 하늘의 도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아브람은 이 믿음으로 그 자손보다 더 가나안 땅을 누렸습니다. 이 믿음이 믿음으로 약속의 현실에 틈타는 마귀라는 솔개를 쫓아내며 약속의 소망을 따라서 가나안 땅을 살아가게 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우리가 배울 믿음입니다. 믿음은 미래의 천국을 오늘로 누리는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의 축복을 오늘 주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이 축복을 주장하면 하나님은 현재의 구원-건강, 치료, 공급, 보호-축복이 되어 주십니다. 아! 저는 어려울 때 이 현재의 구원이 되시는 이 하나님의 축복의 힘으로 틈타는 솔개를 쫓아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인생 나그네입니다. 집 없고, 땅 없어도 믿음으로 주인처럼 삽시다. 주인처럼 누립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국이 현재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미래와 오늘의 현실의 갭을 이 현재적 구원과 축복으로 메꾸어 주십니다. 이 오늘의 구원, 오늘의 은혜, 오늘의 축복이 약속의 현실에 틈타는 솔개를 쫓아내는 언덕입니다. 이 언덕에 의지하여 이 솔개 힘 있게 쫓아내며 약속의 영광스러운 천국의 미래를 추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현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람으로 약속의 현실에 틈타는 솔개를 쫓게 하셨습니까?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16절을 봅시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객이 되어 종살이 하는 것이 애굽의 풍요를 모태로 사용하시겠다는 거지요. 애굽의 고난을 통해서 그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거지요, 아직 아모리 족속이 멸망 당 할 만큼 죄악이 차지 않았다는 거지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구원으로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양육하고 훈련하시겠다는 겁니다.
언약의 성취는 사백년 후의 일이지만 이 언약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는 사백년 후의 일이지만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지금 현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시고,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두워도 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며, 소망이 생깁니다. 이게 은혜의 섭리가 언약의 현실에 틈타는 솔개를 쫓아내는 어덕인 줄로 믿습니다. 아브람이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의지하는 이 믿음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언약을 이루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가 현재하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섭리를 붙잡는 것입니다. 캄캄한 현실이 언약을 이루시는 섭리의 과정임을 아는 것입니다. 터널에 진입하면 캄캄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터널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고난은 약속에 이르는 터널입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 서두르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초조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립니다. 여유와 담대함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가 현실 어둠에 틈타는 솔개를 쫓는 어덕입니다. 믿음은 이 어덕에 의지해서 현실이라는 갭에 틈타는 솔개를 쫓아내며 약속의 미래로 가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두려울 때에 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이 믿음을 배우셔서 그 어둠에 틈타는 솔개를 힘차게 쫓을 수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약의 피가
셋째, 하나님은 언약의 현실에 언약 피라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어덕을 두셨습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아브람에게 피의 계약을 하셨습니다. 계약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거짓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안 가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라야 인간은 믿을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어야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 쪼개 놓고 그 사이를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서로 믿을 수 없어서 서로의 피로서 맹세를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인간처럼 피로 언약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언약을 책임지고 주권적으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속의 언약이지요? 아들의 피로 언약하신 겁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이러신 것입니다. ‘아브람아! 언약의 소망이 흔들리면 이 피의 언약, 이 피의 맹세를 생각해라. 내가 피로 언약했다. 아니 내 피보다 귀한 내 아들의 피로 보증했다. 내 생명, 내 아들의 생명으로 네 자손을 내 나라가 되게 하겠다. 이걸 의지해서 어둠의 솔개를 쫓아내라! 이 피의 언약을 의지해서 두려움의 솔개를 쫓아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이르도록 선택 받았습니다. 고난으로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셨습니다. 이게 언약의 현실입니다. 우리게 실패도 있습니다. 질병도 있습니다. 환난 날도 당합니다. 앞이 캄캄하고 두렵게 합니다. 이런 약속의 현실은 분명 우리의 시험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피의 언약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피로 천국까지 구원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뿌리신 언약의 피가 이 약속의 보증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는 언약의 현실의 어둠에서 이 반석이요 보루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비빌 언덕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약의 현실에서 이 예수를 의지하여 두려움의 솔개를 쫓아내고. 좌절의 솔개를 쫓아내기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천국에 이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조상이 아브람이 이 방법으로 약속으로 나갔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을 보고 현재의 고난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의 소망은 영혼의 닻입니다.(히6:19) 약속의 미래는 현재의 고난을 참게 합니다.(롬8:18) 이걸 우리가 압니다. 이걸 알지만 우리는 육신이기 때문에 약속의 현재 갭이 시험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약함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 당할 때는 피할 길을 내시고 능히 감당하게 비빌 언덕을 주십니다.(고전10:13) 저는 이 언덕 중의 언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그 무엇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보루이십니다. 이 예수의 피가 현재의 시험을 이기고도 남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 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약속의 현실에서 이 예수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예수를 붙잡고 틈타는 솔개를 쫓아내며 천국 길을 가시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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