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8,12,주일강론
본문 : 창17:1-9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은 김소월의 시 한 편을 소개하므로 말씀의 문을 엽니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 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저는 이 시의 절창은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라고 봅니다. 첫 사랑을 잊을 수 없지만, 지금 현재의 사람과 하는 일로 만족하며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래도 첫 사랑은 잊히지 않아서 진정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마엘 재미로 그런대로 지내는 아브람
저는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86세부터 99세에 이삭을 구체적으로 약속받을 때까지 13년의 신앙생활이 이런 상태였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에 환상으로도, 꿈으로도, 말씀으로도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그 하나님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이런 영적인 상태가 참 답답하고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언약의 성취로 믿고, 이스마엘로 만족하고, 이스마엘의 재미에 빠져서 언약의 아들을 위해서 더 이상 기도하지도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로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했다는 겁니다. 이게 영적인 침묵기 침체기를 맞은 사람들의 증상이요, 이것이 침묵기를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13년 침체에서 하루아침에 신앙의 갱신이
이 침묵이 길수록 약속은 지연되고, 신앙은 침체에 빠집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신앙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이 이런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앙의 갱신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이 없는 13년의 고통을 이스마엘이라는 거짓된 만족과 기쁨으로 그런대로 살아가던 아브람의 신앙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갱신 되어 그 신앙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으로 올라섭니다. 이 신앙의 갱신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신앙의 갱신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신앙의 갱신에서 믿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신앙의 갱신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은혜의 산물
이 아브람의 신앙의 갱신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점은 신앙의 갱신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주권적인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갱신을 인간의 의무로만 여기고 회개를 외치고 개혁과 갱신을 부르짖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스스로 자력으로 자기 신앙을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신앙을 갱신시켜주시고 있습니다. 이 갱신에는 아브람이 행위가 전제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의 이 부분에서 이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아브람의 그 어떤 노력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신앙을 갱신하려고 애를 쓰거나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다시 나타나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이 갱신은 어느 날 갑자기 혼연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기대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날과 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갱신도 믿음의 시작과 동일함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신앙의 갱신도 믿음의 시작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어떻게 시작 되었습니까? 아브람의 믿음은 아브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먼저 임재해서 당신을 알려주시는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일 뿐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갱신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부르심을 부를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해 주실 때에 아브람에게 신앙의 갱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갱신은 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은혜자체가 갱신이요, 이 은혜를 받아야 갱신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가 갱신을 외치지만 갱신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갱신의 요구의 홍수 속에 있습니다. 개인도 갱신을 요구합니다. 단체로 갱신을 요구합니다. 한국교회갱신협의회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걸 줄여서 교갱이라고 하지요. 갱신을 주제로 하는 대형회개집회도 합니다. 그런데도 갱신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갱신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인데 윤리나 고치거나 교회의 제도나 방법을 개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갱신을 칭한 단체가 일개 정치단체로 전락해서 교권을 다투는 교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교회의 갱신은 인위적으로 갱신을 요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갱신은 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성화시켜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요구됨
바로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로 그런대로 살아가려는 아브람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찾아오셔서 그 신앙을 갱신시켜 주십니까?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언약하신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믿음으로 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민족을 만드시를 언약하셨습니다. 아브람을 침체에 버려두면 이 언약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신앙을 갱신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 침체에 빠질 때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고 갱신시키십니다. 이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이 은혜로 천국에 이르도록 구원하십니다. 이 은혜로 당신의 거룩하심에 이르게 성화시켜 가십니다. 이것을 성도견인이라고 부릅니다. 갱신에는 성도를 온전케 만들어가시는 이 하나님의은혜를 믿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 은혜를 믿어야 갱신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은혜의 역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브람의 신앙을 어떻게 갱신하여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인식과 경험을 새롭게 하심,
하나님은 먼저 아브람에게 하나님 당신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1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까지 알아온 여호와가 아닌 엘솨다이(EI-Shaddai)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엘이라는 말과 솨다이의 복합어로 엘은 능력 있고 강한 자, 즉 모든 권능의 근원이라는 뜻이고 솨다이는 충분하다는 말로 하나님은 자족자라는 뜻인데 우리 성경에 전능한 하나님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새롭게 경험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이때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셨느냐는 겁니다.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즉 야훼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언약을 세우실 때의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엘 솨다이 전능한 하나님은 그 언약의 성취하실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자손을 약속하실 때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늙은 사래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하실 때는 엘 솨다이의 하나님, 전능하심으로 언약을 이루시는 권능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알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경험시켜 주시되 당신의 백성들의 정황에 부응하여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주신 다는 것입니다. 처음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실 때는 야훼,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아브람이 99세가 되어 사라의 태가 죽은 나무 같이 되었을 때에는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언약을 이루시는 엘솨다이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나타내 주셔서 더 하나님을 새롭고, 깊게 알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즉 여호와는 백성의 전황에 부응하여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는 주시는 성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정황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의 시간, 하나님의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의 정황에 부응하여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새롭고 더 크고 깊게 알고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 은혜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새로운 경지로 신앙으로 이끌어 올리는 영의 갱신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앙의 갱신은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
여러분! 이게 신앙의 갱신입니다. 신앙의 갱신은 하나님을 새롭고도 더 깊이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새롭게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사죄, 칭의,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만났으면, 그 구원의 하나님에서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으면 삶의 문제에서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이레의 하나님, 샬롬의 하나님, 닛시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으로 더 새롭고 깊고 넓게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하나님을 내 삶의 정황에서 새롭게 만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정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면 그 때에 것이 변하고, 분명해집니다. 이때 구원이 분명해지고, 언약이 확실해졌습니다. 이게 갱신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나를 알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고 하신 뜻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내 인생의 날, 영적인 위기의 날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새롭게 만나주시는 영적인 갱신의 날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새롭게 하심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1절을 봅시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완전이라는 말은 타밈으로 완벽, 정결, 비난의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영적, 도덕적으로 흠이 없게 살라는 말입니다. 이 완벽은 하나님의 수준입니다. 너 이정도로 해라! 여기가 네 수준이다! 이러신 겁니다. 이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람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아이쿠! 이젠 나는 죽었다! 이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이 요구를 율법적으로 보는 자들의 해석입니다. 이 율법의 요구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 하나님의 요구는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첫째 이 요구는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목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해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시고 믿음으로 되는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시는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을 하나님 당신이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케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 나는 너를 이 세상 사람들의 수준을 벗어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너 나처럼 되어라, 날 닮아라, 이게 너에 대한 내 구원계획이다. 이러신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구원은 천국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의 형상,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을 본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롬8:29,벧후1:4,엡5:1)아브람이 이렇게 구원을 확신하게 알았습니다. 소극적 구원관이 적극적인 구원관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같이 된다! 이 얼마나 흥분케 하는 말씀입니까? 이게 아브람을 성자가 되게 하는 영적갱신을 일으킨 줄로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 전능하심으로 그 완전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먼저 당신을 전능자로 알리시고 완전함을 요구하신 이유입니다. 네가 부족해서 첩도 두는 어쩔 수 없는 존재지만 내가 여호와로 너를 택하고 세웠으니, 내가 책임지고 내 전능함으로 너를 기필코 나처럼 만들겠다. 이러신 겁니다. 여기서 갱신이 일어난 겁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나를 겨우 언약백성의 조상이 되는 정도로 알았는데 내가 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될 자이었구나! 구원을 천국 가는 정도로 알았는데 구원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구나! 나는 이제 이 구원의 바다에 발목만 잠기었구나! 이제 힘써 이 구원 이루자! 이렇게 구원으로 살게 되는 갱신이 일어났습니다.
셋째, 따라서 이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자기와 자기의 가치와 가능성을 새롭게 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비록 하갈을 취해서 자식을 본 별 볼일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 안에서 나는 하나님과 같이 될 자다. 내가 이렇게 귀하고 가능성이 있는 나다,’ 이런 자기인식을 가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 인식이 하나님처럼 사는 갱신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인식입니다. 이 자기인식이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이게 갱신입니다. 갱신은 자기를 하나님 같이 될 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를 왕처럼 아는 이는 바닥의 삶을 살지 않고 왕같이 존귀하게 살줄로 믿습니다.
개명된 새 이름을 주심
그리고 하나님은 아예 아브람에게 이름까지 개명해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시고, 사래는 사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은 높다, 높고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로 사래를 “나의 공주”를 사라 “왕후”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름을 고쳐서 새 이름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인격 자체인 것 같이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그 사람 인격자체입니다. 이런 이름을 고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자체에 놀라운 변화와 혁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아예 사람 자체를 새 사람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름은 그 사람에 대한 소망입니다. 너는 믿음으로 될 신령한 백성의 조상이 될 자다. 아브람 너에 대한 내 소망과 꿈은 아브라함으로 만드는 것이다. “되게 함이니라”이 동사를 보세요. 하나님은 이름처럼 되게 하시는 maker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좋은 maker이십니다.
셋째, 이 하나님의 개명은 하나님께서 행위대로 우리를 대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신 다는 확증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맵씨, 맘씨, 솜씨에 따라서 이름을 줍니다. 잘 생겼으면 미녀, 미남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착하면 흥부라고 합니다. 심술이 가득하면 놀부라고 합니다. 늘 거짓으로 속이면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맨 날 사고나 치면 사고뭉치라고 합니다. 행위대로 갚아 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러신 식이면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아니라 공처가라고 하셨을 것이며, 사래에게 프린세스가 아니라, 팜므파탈은 심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여자”이라고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 프린세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개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행위대로 갚지 않고 은혜 안에 두어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 안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되게 하시고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시몬을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와 성공회는 세례 받을 때에 세례명을 줍니다. 이제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좋게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허물 많은 우리에게 세인트(Saint)성 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 이름 앞에는 동양권에서는 “聖”자를 서양은 Saint자를 붙이십니다. 저를Saint inkwon, 장로님을 聖 용운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 앞에 이 성 자가 붙는 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은혜가 우리 신앙을 갱신합니다.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줄 믿습니다.
새로운 계시가 일으킨 갱신
그러면 이런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아브람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켰습니까? “아브람이 엎드린대” 이 말이 아브람에게 처음 나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 자체, 즉 예배자체가 엎드림, 경외와 경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엎드렸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지금까지 아브람이 하나님께 엎드렸다는 말을 하지 않다가 여기서 비로소 아브람이 엎드린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이 엎드림에는 지금까지의 경외와 차원이 다른 경외가 있다는 겁니다.
기존의 경외를 뛰어넘는 경외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
첫째, 지금까지 아브람이 경험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뛰어넘는 경외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경외하므로 경배하게 되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룩이란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초월적인 도덕성, 즉 성스러움과 지고함과 위대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룩 하시다고 찬탄할 수 있는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초월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부정한 인생들의 비루한 현실에 내재하실 때에 느끼는 경이와 경외에 압도되어 나오는 찬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초월자로만 계시면 인생은 하나님을 알 수 도 없기 때문입니다.(출19:16,사6:1-5,삿13:20,22)초월자가 비천한 한 인간의 비루한 삶속에 나타내주실 때 인간은 비로소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된 경외에서 엎드려 하나님을 거룩하시다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룩 하시다고 일컫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탄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날 때입니다.(출14:31-15:1)본문의 아브람이 이걸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스마엘을 낳고, 이스마엘에 빠져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죄지은 아담이 하나님이 오시는 소리에 숨었지요. 아브람이 이런 심정일겁니다. 크게 혼내실 것으로 알았을 겁니다. 이제 나는 죽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오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불신앙에 대하여서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99세라도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시려고 전능한 하나님으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15장의 불과 피의 언약의 큰 은혜를 입고도 믿지 못하여 첩을 드린 자기를 이렇게 버리지 않고, 용서하시고,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해주시는 은혜에 압도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게서 아브람은 지금까지 경외를 뛰어넘는 경외로 엎드려 하나님을 거룩하시다 일컫게 된 것입니다.
이 감격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다”(시130:3-4)한 없는 용서, 용서에 한계가 없으심에서 아브람도, 다윗도 하나님의 크심을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이 압도적인 은혜가 아브람을 엎드리게 하고 하나님을 거룩하시다 일컫게 된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갱신입니다. 아브람에게 이 갱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이 반응이 갱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렇게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만나고 그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거룩 하시다고 부르는 신앙의 일대 갱신이 일어나기를 열망합니다. 갱신은 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긍정에서 나온 깊은 회개
둘째는 이 엎드림에는 하나님에 대한 긍정에서 나오는 깊은 회개가 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렇게 하나님을 새롭게 계시해주시고, 너를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 꾸짖지 않으셨으나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주시고,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 자체가 아브람의 불신앙을 정죄하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심문이나 추궁이 필요 없습니다. 삭개오와 같이 하나님 면전에서는 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직고하게 합니다.(롬14:11,12) 더구나 전능자로 당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과 불순종을 인식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브람의 엎드림은 이 하나님을 승인한 것입니다. 예, 하나님 당신이 옳습니다. 당신은 전능자이십니다. 나는 당신의 이 전능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깊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다는 자기를 부정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하나님을 옳다고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 분 앞에서 나는 틀렸다고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엎드림입니다. 이걸 회개하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하나님을 긍정하고 그 앞에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게 갱신입니다.
입술의 언어를 잃은 순종의 결단
셋째, 이 엎드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의 요구를 받아드려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인간의 말을 잃은 침묵의 결단입니다. 칼빈선생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브람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침묵을 지키므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떠드는 것보다 훨씬 더 충분하게 그 각오를 선언해 주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5:2)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만나면 그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육체는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입술을 가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서는 인간의 언어를 잃습니다. 이게 경외입니다. 이 하나님 경험이 있어야 변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만나서 그 앞에 말을 잃고 엎드리는 것이 갱신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요구 앞에 엎드렸다가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 그 결단으로 일어나 나가서 삶으로 순종하는 것이 갱신입니다. 이게 부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이제 서두에 소개한 시를 다시 음미해 봅시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영적인 상태가 만족하지 못해도 이스마엘의 재미로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스마엘로는 결코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이삭이라는 최선의 것을 받기 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거짓된 만족으로 그런대로 사는 침묵기를 참을 수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영적인 침체를 참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당신의 임재를 잃은 우리 찾아주십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사죄 칭의 새 생명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기업을 누리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것은 초보에 불과 했습니다. 이것은 얕은 물가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이 위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한 우리에게 ”거룩 聖자, Saint 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聖자, Saint가 이름 앞에 붙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 신앙을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침체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신앙의 갱신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갱신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려고”할 것이 아니라 이 갱신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갱신의 하나님으로 내 영혼을 찾으실 때에 아브함과 같이 그 앞에 엎드리는 믿음의 응답을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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