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12:1-4
말씀 : 라인권목사
지난주일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의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행해야 하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개인적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반응, 역할 책임을 부정하나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우선 믿음이 이렇게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하면 이 믿음은 인간의 어떤 행위나 삶이 요구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행해야 가능한 것이라면 믿지 않는 것은 불러주시지 않는 하나님 책임이지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 된 자를 은혜로 부르시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모든 질문은 믿음과 은혜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이 때문에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행위는 은혜에 반하는 율법주의라고 믿음과 은혜에서 인간의 응답, 역할을 부정합니다. 여기서 율법 폐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은혜와 믿음에 대한 마술적이며 기계적인 비인격적 인식
이것을 데니스 레인은 칭의를 하나의 거래와 같이 알아서 이미 끝난 것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음과 은혜에서 인간의 역할, 인간의 반응,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믿음과 칭의나 구원의 은혜를 잭크의 콩 나무와 같이 여기고, 비인격적으로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교리주의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요 응답이라고 할 때 이 믿음의 응답, 반응이 무엇을 의지 하는 지를 아브람의 사례를 통해서 배우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에게서 일어나는 믿음이라는 응답은 어떤 것입니까?
분리의 결단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
첫째, 믿음은 자기를 죄악적이고 불신앙적인 것에서 구별하여 떠나라는 분리의 결단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성별의 결단을 요구하심에 응답해서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난 사람에 분리를 요구하십니까? 그것은 이 구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기본적인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떠나라”고 이 세상에서 불러내서 성별하시려고 분리의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분리한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자기를 부르신 그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려면 이 분리의 명령에 결단하고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구별됨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이유입니다. 아브람은 이 분리의 결단의 요구에 응답해서 결단하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순종을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리의 결단을 요구받고, 이전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는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죄와 불신앙적인 것을 무엇이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믿기 이전에 보배로 여기던 것을 분토로 여기고 흔연하게 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빌3:8) 이것이 살아계신 구원의 하나님을 만난 우리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성별의 요구에 대한 사람의 결단과 순종! 이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이
그리고 이 분리의 요구에는 전적인 의탁의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이 분리 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했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삶의 기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이가 75세였던 아브람에게는 더욱 힘든 결단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생활의 기반을 포기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분리의 요구는 자신의 인생과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고 단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요청입니다. 아브람이 이 하나님의 분리의 요구에 순종해서 떠난 것은 그가 자신을 크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삶의 토대를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을 믿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서 마음 놓고 자신을 의탁한 한 것입니다. 믿음이 은혜라고 할 때 이것이 믿음이 은혜라는 뜻입니다.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있게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 응답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으로 만나서 지금까지 자기로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믿음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이 은혜와 이 응답이라는 두 인격적인 요소가 하나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살면 그 분과 관계에 사활이
그리고 여기에 이 분리의 요구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즉 하나님이 삶의 방식이면 그 삶의 사활이 걸린 것이 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못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죄악적인 것, 불신앙적인 것에서 다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분리를 요구 받는 것은 꼭 악한 것만이 아닙니다. 아비집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떠나라는 것입니까?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에는 이 분리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를 위해서 모든 불신앙적이며, 죄악적인 것에서 이별하는 것이요, 떠나는 것이요,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절을 봅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하십니다. 이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아브람의 반응, 응답입니다. 75세인데도 자신의 인생과 가족과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과감하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 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출발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 이 구별함, 분리가 없다면 믿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셨다면 지금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죄악과 불신앙적인 모든 것에서 자기를 분리하시고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새로운 인생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
둘째, 믿음은 새로운 인생의 목적지를 찾아나갈 것을 요구 받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분리가 목적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을 내 인생의 목적지로 삼아서 그 목적지 찾아 나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5절이 보여주듯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찾아 나섰고 그 목적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추구했다고 합니다.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는 말씀을 보십시요. 믿음은 이렇게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고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들어간 그 가나안 땅은 무주공산이 아니라 주인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성경은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시지 아니하시고”(행7:5)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돌아가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람인데(히11:10)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히11:16) 즉 세상나라가 아니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여주신 이 나라를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평생을 본향을 추구하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히11:14) 이게 하나님을 만난 아브람의 반응이요, 응답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면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썩어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고 그 나라를 인생의 목적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가 인생의 골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천국이 인생의 골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을 추구하는 순례자로 이 세상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목적이 없으면 사람은 부패하고 허망해집니다. 그래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5:32)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당신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 이게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시지 못한 것입니다. 인생은 목적이 이끌어갑니다. 믿음이란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셔서 믿음으로 천국이라는 새로운 목적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만드실 것을 받아드림
셋째,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되게 하시고 이루실 것 받아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동사들을 주목하십시오, “이루고”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 지니라” 이를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I will make you" 우리 하나님은 make이십니다. 가장 좋은 메이커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자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을 받아드리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고, 복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람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에 반응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빗어 가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나를 따르라 네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마4:19)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도록 나를 주님의 손에 의탁하는 것이요. 나를 만드시는 섭리의 손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만드시는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동적이거나 기계적이 아니라 인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장 좋은 메이커이십니다. 주님을 우리를 천국까지 잘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 같이 되게 가장 잘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응답하여 감사하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요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세상과 맞서 나감
넷째, 믿음은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나를 의탁하고 세상과 맞서나가는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나를 통해서 다 이루시기 까지 그 과정에서 나를 돌보시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루어 가실 때에 만약 적대세력이 그 언약을 이루는 것을 가로막으면 하나님이 친히 전쟁을 하는 전사가 되어서 전쟁을 해서라도 언약을 성취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여기에 응답해서 하나님의 지키심 안에 자신을 의탁하고 알지 못하는 가나안 땅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가 되시게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투신하고는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을 치려고 단지 318명의 가군으로 참전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자신을 둘 때 하나님은 바로와 아비멜렉도 아브람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자신을 맡기고 세상과 맞서 나가게 하는 사람의 응답입니다. 이 응답이 있는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요, 믿음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가는 동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요, 보호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보호자가 되실 것을 약속하시고 당신의 보호 아래로 들어오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응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 안에 두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키시고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시23:4) 다윗은 이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나님이 방패와 산성이 되심을 경험해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장엄하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딤후4:18) 이게 소위 말하는 믿음의 능력!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나셨습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날개 아래에 당신을 두고 담대히 죄와 이 세상과 사탄에 맞서 나가시는 이 믿음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은 삶이요 그 동력
그러므로 믿음은 생활이요, 삶의 동력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분리의 부름에 응답하여 자기를 세상에서 구별해나가는 삶으로 응답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적으로 가지게 되고 그 나라를 추구하는 나그네의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고 추구하는 삶이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를 위대한 사람, 복의 기관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맡겨서 하나님이 자신을 자신을 만드시도록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보호아래 자신을 두고 담대하게 세상과 맞서나감으로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이 믿음에 마술적인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기계적인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이 믿음은 비인격적인 아니라, 인격적이며 전인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생활이요, 그 삶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 이 생활로 우리 조상 아브람은 보이지 않는 나라와 하나님을 보게 하여 믿음이 실상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약2:22)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벗이 되기에 이르도록 자라갔다고 하셨습니다.(약2:23) 기독교의 신앙은 메마른 교리이거나, 하나의 이론이나 이상이 아니라, 행동과 삶을 일으키는 동인이요, 역동성을 가졌다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신앙관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터 아브람이 이 믿음, 즉 자기를 구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목적지로 가며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이 영광스러운 일에 어떻게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아래 두어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하나님의 벗이 되는지를 공부할 것입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지금은 믿음과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이 삶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여 믿음이 실상이 되게 하여, 믿음의 실상을 보이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거듭나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하나님 만나서 아브람 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야만 아브람과 같이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게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하고 복을 가져와 믿음을 실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은혜에 전인적으로 응답하는 믿음만이 내게 구원과 삶의 능력이 되며 세상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성신께서 이 시간에 우리가 아브람 처럼 믿음의 응답을 할 수 있게 임하시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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