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행/길에서 줍는 진주

헤밍웨이가 사랑한 섬 키웨스트에서 1박 2일

아브라함-la 2021. 5. 4. 21:42

 "헤밍웨이가 말한 희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문학은 지금도 살아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부귀와 영달보다, 문학과 예술을 꿈꾸는 건 어떨까? 저 호머는 지금도 세인들이 알고 있지만, 그 숫 한 왕후장상, 부호들은 누가 알며, 그들의 권세와 부귀영화는 아예 그 종적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문학과 예술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문학과 예술보다 영생의 복음을 추구함이 더 좋을 것이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전 12:12) 헤밍웨이 집 발코니에서 아름다운 정원과 어두운 밤 항해를 지로 하는 등대를 보며 스쳐간 생각들이다."

                                                                 - 본문 중에서 -

 

- 세븐 마일 브리지 -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발을 하기 위해서이다.”  Key West처럼 이 괴테의 말이 꼭 맞아떨어지는 여행지도 드물 듯하다. 키웨스트로 가는 길인 수많은 산호섬들을 이으며, 아름다운 비췻빛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171km가 넘는 "해상고속도로" 자체가 관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따뜻한 열대기후로 플로리다와 키웨스트는 미국의 부호들의 별장인 저택들이 즐비하고, 휴가나 혹한을 피하여 달려가 휴양과 낚시와 해상 레포츠를 즐기는 미국인들의 휴양지이다.

 

나 같은 사람이, 그것도 생애 첫 아메리칸 트립에서 유서 깊은 보스턴이나 뉴욕이 아닌, 미국인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휴양지 키웨스트를 목적지로 한 것은 의외로 여겨질 법도 하다. 나는 제목처럼 헤밍웨이를 흠모해서 그의 문학의 자취를 찾아 그가 사랑한 섬 키웨스트를 찾은 것도 아니다. 가끔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좋게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여행도 그러하다. 이번 여행은 미국에서 고학으로 대학원을 마친 아들의 졸업식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간 김에 뉴욕의 제자 목사네를 방문하는 길에 워싱턴DC로 해서 뉴욕과 보스턴 정도를 돌아보는 여정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준비를 돕던 사위가 겨울 추위가 한창인 북쪽의 뉴욕보다는 남쪽의 따뜻한 키웨스트를 가실 것을 권했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다. 여행에 대한 나의 로망 중의 하나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일망무제의 지평선 앞에 서보는 것과, 망망한 바다에서 밀려 오는 푸른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도로를 종일 달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이 없다는 플로리다가 이 로망에 최적일 것 같았고, 목가적인 나는 인공의 도시보다는 자연이 좋을 뿐만 아니라, 남들처럼 미국을 자주 가는 것도 아니므로, 남들이 흔히들 다니는 곳보다, 가지 않는 곳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워싱턴에서의 그 혹독한 추위! 그리고 미 대륙 동쪽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며 드른 인상 깊었던 찰스턴을 위시한 아름다운 경유지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키웨스트의 풍광은 이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실감케 해 주었다. 이 덕에 나는 첫 미국 여정에서 흰 눈 내리는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서 야자수 우거진 미 대륙 최남단 땅끝까지를 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플로리다 키즈 그리고 오버시즈 하이웨이 -

플로리다 키즈

키웨스트는 플로리다 키즈The Florida Keys  - key는 스페인어 에서 온 말로 섬이라는 뜻 -라고 이르는 플로리다주 최남단 동쪽 끝자락 바다에서 시작되는 1,700여 개의 산호초 열도 중에 하나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단 동쪽 끝자락 인근의 섬 키 라고스에서 시작하여 쿠바 쪽 카리브해를 향하여 점점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산호섬 40여 곳을 42개의 다리로 연결한 마지막 섬이 키웨스트이다. 내륙 접점에서 키웨스트를 잇는 이 도로가 꿈의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 높은 “Overseas Highway로 그 길이가 무려 171,4km에 달하는 말 그대로 해상 고속도로이다. 그리고 이 구간이 저 US1 도로의 첫 구간이다. 비췻빛 바다, 열대 풍경의 4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을 잇는 오버시즈 하이웨이가 망망한 비췻빛 바다의 수평선을 향하여 뻗어 나가는 길을 달린다고 생각해보라!

 

- 플로라다 키즈를 이어 가는 오버시즈 하이웨이 -

그래서 키웨스트 관광은 키웨스트로 들어가는 여정 자체가 관광이며, 여행이고, 키웨스트에서, 그리고 키웨스트를 나오는 길 자체가 여행이다. 이렇게 키웨스트는 여행은 도착이 아니라 출발하기 위한 것” 이라는 괴테의 말이 가장 잘 어울리며, 앤드류 매튜스의 목적지에 닿아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을 실감나게 하는 곳이다. 여행이란 준비 할 때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목적지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떠나가는 것이며, 돌아오기 위하여 출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여행은 인생과 같은 것이다.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과정이 좋아야 진정한 삶이요, 좋은 여행이기 때문이다.

 

- 키웨스트로 들어가는 길 -

키웨스트에 이르는 오직 한 길

이 키웨스트에 이르는 길은 시작은 둘이지만, 키 라고스에서 한길이 된다. 미 대륙 동부를 남북으로 잇는 US1도로가 마이애미와 홈스태드를 지나서 플로리다 시티에 이르면, 여기서 서든 글라데스 동쪽 끝자락 지역을 지나 바다를 건너 키 라고스를 잇는다. 이 플로리다 시티에서 US1도로는 카드 사운드 로드와 갈라진다. 카드 사운드 로드는 US1도로 북쪽으로 나서 내륙 접점에서 바다를 건너 노스 케이 라고스 섬을 경유해서 키 라고스에 이르러서는 다시 US1 도로와 하나가 된다. 이 지점부터 키웨스트까지 섬들과 바다 위를 달리는 구간을 오버시즈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키웨스트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오버시즈 하이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국인들의 꿈의 휴양지 키웨스트에 이르는 길이 외길 하나라면, 영원한 하늘의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이 어찌 두 길이랴! 오직 한 길 믿음의 길이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 않을까?

 

키웨스트로 가는 길의 풍광

올랜드에서 팜비치를 경유해서 사우스 마이애미에서 일박을 한 우리는 설레는 가슴으로 US1도로에 올라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 키웨스트로 행했다. 플로리다 시티 분깃점에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Card Sound Road로 들어섰다. 미국에서 Road라는 명칭은 주로 두 지점을 잇는 2차선 길을 의미한다. 이 노선을 택하면 거리는 더 멀어지지만, 키 라고스 위쪽에 있는 노스 케이 라고스 섬을 경유하며 그 섬의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키웨스트로 들어갈 때는 카드 사운드 로드를 이용하고, 나올 때는 US1도로를 이용하여 양편 지역의 풍광을 다 보려 한 것이다.

 

카드 사운드 로드는 우선 미국에서 Road"로 부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2차선의 조붓한 도로가 요금소에 이르기까지 거의 직선으로 습지를 지나고 있었다. 가끔 지나치는 맹그로브 숲에 쌓인 푸르른 수로가 아름다웠다.  "Welcome to the Florida Keys" 요금소 앞의 표지판이 드디어 플로리다 키즈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요금소를 통과하자 길은 곧 키웨스트를 가는 바다의 첫 교량으로 이어지고, 다리는 고갯마루 마냥 솟아올라 전방이 보이지 않아서 바다로 빠져드는 느낌을 일게 했다. 그 다리 고갯마루에 이르자 좁은 만 건너편으로 푸른 숲에 덮인 얕트막 한 섬이 길고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이 섬이 키웨스트로 가는  플로리다 키즈의 첫섬이자, 가장 큰 섬인 노스 케이 라고스이다,

 

- 안내판 처럼 저 요금소 앞 다리를 건너면 플로리다 키즈이다 -

                                     - 아치로 솟은 다리가 바다로 뚝 떨어질 것만 같다 -  

아쉽게도 이 첫 다리에 이르자 오락가락하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우리를 돕지 않고 있었지만, 길고 나지막한 푸른 섬이 바다와 구름과 비 안개에 싸여 있는 풍경이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했다. 이 첫 다리를 건너 노스 케이 라고스 섬에서 키 라고스 방향으로 들어서자 지금까지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2차선 도로 양편에 푸른 수림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맹그로브 같기도 한 이 수림의 벽은 끝이 없는 듯했다. 이 이채로운 풍광에 사로잡혀 한 곳에 차를 대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인증 사진을 박았다. 이 수림의 벽은 키 라고스에 이르는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섬의 다리들을 지날 때 보이는 청록빛 바닷물이 우거진 맹그로브 숲 속으로 강처럼 흘러가는 수로는 이곳이 얼마나 잘 보전된 청정지역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퍼온 사진 교량 상판 검은 부분이 선박 통과시설 -

키 라고스에 이르러 우리는 그 이름 높은 오버시즈 하이웨이에 들어섰다. 몇 개의 섬들을 지나자, 오버시즈 하이웨이가 비취 빛 망망한 바다로 바다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 오버시즈 하이웨이를 중심으로, 남쪽은 멕시코 만으로 이어지고, 북쪽 바다는 대서양이다. 오버시즈  하이웨이가 멕시코 만과 대서양을 가르는 셈이다. 아쉬웠던 건 그날 하늘이 흐리고 가끔 비를 뿌려서 그 아름다운 비췻빛 바다 빛을 오롯이 볼 수 없었던 점이다. 그러나 비가 오락 가락 하는 그 망망한 해상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운치가 있었고, 그 옥빛 바다 망망한 수평선 위로 거대한 먹구름이 오르는 광경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장관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 아일라 모라다 섬 들목에 이르러 우리는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러, 해변에 위치한 해산물 전문 뷔페에 들어가 대서양이 펼쳐지는 창가에 자리를 정했다. 규모가 대단한 식당이었는데 불과 너 댓 팀이 식사를 할 뿐이어서 고적할 지경었다, 채소와 굴이 싱싱했고 내 입맛이었다. 주로 킹 크랩으로 접시를 채웠는데, 식사보다 쪽빛 대양에 비를 뿌리는 풍경이 나를 더 배부르게 했다. 식사를 끝내고 그 바닷가에 나서니 비는 그치고 바람이 심했다. 키웨스트 쪽 수평선 위에 장관인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해변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다시 키웨스트를 향했다.

 

- 식당 해변 풍경 맑았으면 이런 풍경을! 퍼온 사진 -

마라톤에 이르러 마라톤 섬 맨 끝자락에서 차를 해변가로 돌렸다. 마라톤 섬은 오버시즈 하이웨이 중에서 가장 긴 다리인 세븐 마일 브리지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끝이 보이지 않게 키웨스트 쪽 바다로 뻗어 나가는 세븐 마일 브리지의 장관을 볼 수 있고, 그 들머리를  얼마간 지나서 둥글게 솟아오른 세븐 마일 브리지를 감상할 수 있는 포토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이 포인트에 야자수가 둘러선 열대 풍 선셋 그릴이라는 바가 있어 차를 대려 보니, 자본주의 나라답게 입장료 받고 있있다. "지갑이 가벼운 게 여행의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했던가? 사진 한 장 찍고 나올 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근처 공터에 차를 대고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세븐 마일 브리지에 올랐다.

 

이 세븐 마일 브리지야 말로 171.4km에 달하는 오버시즈 하이웨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곳이다. 171km이면 서울에서 대전을 지나, 충북 영동에 이르는 거리이다. 완도에서 제주까지 거리가 94,4km인걸 생각해 보라! 이 거리를 비췻빛 바다의 망망한 수평선으로 뻗어나가는 해상 고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이 오버시즈 하이웨이를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아는 것이다. 이 구간 중 마라톤 키와 리틀 덕 키 구간 7마일, 11km를 잇는 다리가 이 세븐 마일 브리지이다. 이 세븐 마일 브리지와 함께, 1935년 노동절에 인 기록적인 허리케인으로 많은 곳이 유실되어 폐쇄된 키웨스트 해상 철길이 평행으로 망망한 수평선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것이 장관이었다. 비췻빛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대서양과 멕시코 만으로 가르는 11km의 다리를 달리는 그 상쾌함이라니,

 

- 세븐 마일 브리지 곁의 폐쇄된 키웨스트 해상철도 수평선엔 긴 섬들이 떠있다 -
- 퍼온 사진 세븐마일 브리지의 하늘빛 보다 깊은 바닷빛 -

리틀 덕에 이르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 장관을 보러 나섰다. 리틀 덕에서 마라톤을 향해서 평행으로 멕시코 만 쪽으로는 구 도로가, 대서양 쪽으로는 세븐 마일 브릿지가 전봇대와 함께 수평선을 향하여 아슴하게 뻗어나가다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영화 트루 라이즈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해리어기를 타고 이륙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보는 낙조도 이름 높은 모양이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다가 다시 키웨스트로 향했다.

 

-퍼온 사진 세븐마일 브리지에서 보는 낙조 -

이 오버시즈 하이웨이를 달리며 지나치는 산호섬들, 자잘한 맹그로브 숲들, 아득한 수평선에 낮고 길게 드리워진 섬들이 이국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섬은 산이라서 바다에서 불쑥 솟아 올라 우뚝하니 도드라져 있지만, 플로리다 키즈의 1,700여 개의 군도들은 산호초로 형성되어서 해수면보다 약간 높을 뿐이어서, 마치 평야의 두렁들 같고, 바다에 통나무가 떠 있듯, 띠를 길게 두른 듯하여, 길고 둥글어 순한 풍광이 우리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바다를 가로지르는 오버시즈 하이웨이도 교각의 높이가 낮아서 바다가 더 망망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었다.

 

- 드디어 여기가 키웨스트 라는 표지판이 - 
- 키웨스트 전도 -

키웨스트 미 대륙 최남단 포인트

이 세븐 마일 브리지를 지나고, 많은 섬들과 바다를 지나 드디어 미 대륙 최남단 섬 키웨스트 들목에 들어섰다. 여기가 키웨스트라는 도로 표지판이 우리를 맞았다. 여기서 우리는 곧장 미대륙 최남단 포인트로 향했다. 우리로 하면 해남 땅끝 마을이랄까? 거기 쿠바 쪽 바닷가에 마치 거대한 팽이를 거꾸로 세운 듯 한, 미 대륙 최남단 포인트 조형물이 서있었다. " 90 miles to CUBA" 여기서 쿠바가 90마일여기서는 미국 본토보다 쿠바가 가까운 셈이다. 이 포인트 앞쪽 도로 가장자리 배수구로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닷물이 간헐천과 같이 솟아 올라 관광객들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이 포인트에서 인증사진 한 장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줄을 선 곳이 야자수와 열대식물 정원의 아름다운 저택 담장 아래의 보도인데, 거기에 "THE SOUTHERNMOST SOUTHERNMOST HOUSE U.S.A" "미국 최 남쪽의 남쪽 집"이란 동판이 붙어 있었다.

 

우리 차례에 사진을 몇 장을 찍고는 근처의 바다로 나갔다, 해변의 카리브 풍의 건물들, 종려와 야자수가 늘어진 거리와 낮은 호텔들과 리조트들, 페인트를 한 목조건물들, 고운 산호모래 해변이 인상적이었다. 쿠바 쪽 저무는 바다에 범선 한 척이 한가로이 떠 있고, 해군 기지인지, 커다란 흰색 골프공 모양을 한 돔과 철탑이 그 바다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서 숙소로 가기 위해서 섬 북쪽 해안을 따라서 키웨스트 공항 방향으로 나 있는 해변 대로에 나서자, 저 망망한 키웨스트 바다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키웨스트의 선셋은 유명하지만, 구름으로 어두운 하늘이 우리에게는 그 아름다운 선셋을 하락하지 않았다. 공항 인근의 호텔은 한적하고 널찍하고 편리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저녁 식사와 키웨스트의 야경을 보러 다시 시내로 나섰다.

 

- 숙소 호텔의 수영장 풍경 -

탄절을 앞둔 키웨스트의 밤

이미 저녁 시간이 기울었다. 서둘러 헤들리의 아내가 소개한 "블루 해븐"을 찾아갔다. 주택가에 있는 이 식당 입구는 야자수 숲 이미지였다. 들어서자 마당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목 벤쟈민 고무나무(?)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 엄청난 푸른 고목나무 아래에 설치된 무대에서 라이브로 아바나 풍 재즈가 연주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보니, 다들 들뜬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아마도 성탄절에 키웨스트를 왔다는 감격, 그리고 성탄절 키웨스트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람들을 들뜨게 한 것 같다. 이미 밤이 깊어서 라이브 연주도 끝났지만, 거기 관광객들은 흘러나오는 음악의 장단에 연신 몸을 흔들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담소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온 식사는 좋았다. 라이브 공연을 못 본 것을 아쉬워하며 키웨스트 밤거리로 나섰다.

 

성탄절을 불과 며칠 앞둔 키웨스트의 밤은 아름다웠다, 종려와 야자수, 그리고 이름 모를 열대 수목이 숲을 이룬 거리, 그 열대의 따뜻한 밤거리의 가로수와 가로등에 장식한 성탄 트리로 키웨스트 밤거리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 거리의 가게와 업소들의 성탄 트리는 나그네를 부르고, 집집마다 단 한 집도 빠짐없이 처마나 창문이나 정원수에 장식한 가정집 성탄 트리는 성탄에 대한 경건한 애정을 표하는 듯했다. 에이는 추위 속의 흰 눈 쌓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성탄절 이미지인 우리에게 야자수 우거진 키웨스트의 성탄 풍경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성탄절을 맞는 키 웨스트의 밤은 성탄트리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트리 자체가 요란하지 않았지만, 성탄트리의 빛이 어둠을 깨여 밤을 낮인 듯 야하게 하지 않고, 어둠을 고즈넉하게 밝히고 있었다. 등불로 은은한 호이안의 밤거리가 떠올랐다. 이렇게 사랑도 유별나거나 유난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앙도 유난스러운 건 열정 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열정주의는 삶을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게 하지만 오히려 참 신앙은 자연스러우며 삶과 어울리는 것이다. 키웨스트의 밤거리를 거닐며 가게 몇 곳을 들어가 아이쇼핑을 하곤 숙소로 행했다. 시가를 벗어 난 한적한 곳의 아주 소박한 집의 소박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찍고는 이내 숙소에 들었다.  거의 한 나절을 수평선을 향해 바다 위를 달렸다니! 그리고 성탄시즌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키웨스트라니! 행복한 피곤이 몰려왔다. 키웨스트에서 첫 밤, 성탄절을 맞는 키웨스트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키웨스트의 일출

이튿날 아직 이른 아침 홀로 산책을 나섰다. 호텔을 나서 마을 중심 로터리에 이르자 종려나무 가로수길 너머로 빼꼼하니 바다가 보였다. 그 길의 끝은 작은 만이었고, 시원한 4차선 대로가 해변을 따라 나있었다. 키웨스트 절반을 외곽으로 순환하는 루즈벨트 대로였다. 이 길을 건너 멀리 도로가 아스라이 섬을 휘돌아 가는 곳까지 키웨스트의 아침 바닷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 공기가 맑다 못해 그냥 맛있었다. 절반쯤 걸었을까? 맹그로브 숲 사이로 보이는 망망한 키웨스트의 바다에 막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역광으로 맹그로브 숲도 바다도 검은빛이었다.. 잔물결이 이는 검은빛 키웨스트 바다에 옅은 금빛을 드리우며 붉은 해가 떠오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이 아름다운 키웨스트의 일출은 생각도 못한 행운이었다. 역시 일찍 일어나는 새는 더 많이 먹는 법이 아니던가?

 

숙소로 돌아오며 이런 곳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 맑고 따뜻한 대기. 아름다운 바다, 종려와 야자수,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열대식물로 가득한 파라다이스 분위기의 조용하고, 깨끗한 거리와 마을들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평생을 목자로 산 사람은 이런 마음이 이는 것도 죄스러워야 할까? 이런 마음이 내 신심이 부족해선지 모르지만, 그곳 사람들이 부러워 아름다운 정원수로 잘 가꾸어져 있는 아담한 집 두어 곳을 기웃거려 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준비해 두었던, 즉석밥과 컵라면으로 조식을 때운 후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시작되는 날이다. 오전에 키웨스트 시내를 관광하고는 키웨스트를 나와 플로리다 반도를 횡단하여 탬파에서 일박을 하고는 북행하여 애틀랜타에서 밤 비행기로 귀국할 것이기 때문이다.

 

키웨스트 시내 풍경

그날 오전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이었다, 우선 US1도로 제로 마일 포인트를 찾았다. 우리의 경우 국도 기점에는 도로 원표라는 표지석을 세운다, 거기에는 그 도로의 연원과 연장거리와 종착지가 표시되어있다. 나는 이런 도로원표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흔한 도로 표지판에  US1도로가 북을 향하는 제로 마일 임을 표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시발한 이 US1도로는 키웨스트 바다를 건너 플로리다 동부 해안을 따라서 북행하여, 미 대륙 동부의 대도시들을 이어 가다 마침내 미국 동부 최 북단 메인주의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는 종점 포트 켄트에 이른다. 이 장대한 도로 기점의 도로 원표가 달랑 교통표지판 같은 표지판 하나라니! 미국인들의 실용주의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의 집

거기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미국 문학의 자부심인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저택 - 저택이라기보다 헤밍웨이 집이라 함이 옳을 듯-을 찾았다. 지금은 그를 기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헤밍웨이의 저택의 첫인상은 허술함이었다. 그 집을 두른 담장 때문인데, 그 붉은 벽돌 담장은 조적공이 아닌 사람이 서툰 솜씨로 허투루 쌓은 듯했다. 예전의 키웨스트는 붉은 벽돌이 비쌌다는데 본토보다 가까운 쿠바에서 수운해야 해서- 왜 그 비싼 붉은 벽돌을 그렇게 허투루 쌓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들어가는 문도 허술함 그 자체였다.

 

-집은 저택의 풍모는 아니나 정원은 저택의 풍모 -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서자,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는지 한글로 된 안내서를 건넸다. 이 미국 최남단 섬에도 우리 한국인 관광객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 헤밍웨이의 집에도 미국의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했다. 비싸도 입장료야 당연하지만, 해설사의 안내는 별도의 페이를 내야 하고, 이렇게 돈을 낸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나야 그 영어 해설을 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처지에 굳이 돈을 낼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안내서를 보며 돈 낸 사람들에게 밀리며 그 집 구경을 하다가 사람들이 없을 때에 본체 실내를 다시 돌아보아야 했다. 

 

-널찍한 방 하나가 화장실이다! -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는 그네들의 서정과 예술 혼에 영향을 미친 영감의 장소가 있는 법이다. 시인 예이츠의 “이니시 프리”  폴 고갱의 타이티 섬이 그러하듯 키웨스트는 헤밍웨이에게는 천혜의 고장이었을 것이다. 아열대 아름다운 바다와 섬 풍경은 상처 많은 헤밍웨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최적이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낚시광인 그의 기호를 충족시켜 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헤밍웨이 문학의 백미인 노인과 바다는 아바나와 키웨스트의 이런 풍광의 배경에서 잉태되고 출산된 작품인 것이다.

 

-별채 집필실, 헤밍웨이는 여기서 오전에 글을 썼다 -

이 집은 해양 건축가이자, 난파선 구조원이던 에이샤 티프트가 키웨스트에선 처음으로 수도시설이 된 문화주택으로 1851년에 지은 집이라 한다. 1851년에 지어졌으니, 이제 170년이나 된 집이지만 이 집은 여전했다. 이 집이 헤밍웨이의 소유가 된 것은 1931년의 일이다. 재력가였던, 두 번째 부인 폴린 Pauline의 삼촌이 8,000달러에 경락을 받아서 이들에게 결혼 선물로 준 집이다. 이런 폴린의 후원으로 헤밍웨이는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는 이 집에서 폴린과 이혼하던 해인 1941년까지 살았다.

 

이렇게 폴린과 함께 키웨스트에 정착한 헤밍웨이는 이 집에서 하드보일드 문체”의 헤밍웨이 문학을 출산했다. 그는 여기서 <무기여 잘 있거라> <킬리만자로의 눈>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 다수의 소설을 냈고, 1952년 아바나에서 쓴 <노인과 바다>1953년에 프리쳐 상을,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헤밍웨이는 유서 깊은 유럽 문화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미국 문학의 긍지와 자부심이 된 것이다. 따라서 폴린은 헤밍웨이의 창작의 나래를 마음껏 펴게 한 고마운 아내이다. 이 폴린이 헤밍웨이와 결정적으로 파경에 이른 건 그가 만든 수영장 때문이다.

 

20미터의 이 수영장은 지금도 키웨스트의 개인 수영장으로는 가장 큰 수영장이라고 한다, 사치스러운 폴린이 이 수영장을 만드는데 20.000불이 들었다, 이는 당시 이 집값의 네 배가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 셈이다. 이런 막대한 공사비가 소요된 것은 키웨스트의 지질 때문이다. 키웨스트는 산호섬이기 때문에 땅이 쉽게 파지지 않는다, 땅을 파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헤밍웨이가 이 명세서에 놀라 아내인 폴린에게 내 마지막 1센트까지 가져가라!”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1센트를 던졌다나, 수영장에 박혀 있는 이 동전을 찾는 재미를 즐기는 관광객들은 이 수영장과 그 동전에서 무엇을 생각할지 궁금하다.

 

헤밍웨이의 집에서 놀란 것은 2층의 화장실이었다. 그 널찍한 방 하나가 다 화장실이었다. 창문 쪽에 욕조와 변기가 설치되어있고, 다른 공간은 비어 있었다. 공간이 권력이란 말이 실감 났다. 그리고 재미있던 건, 그 집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고양이들이다, 유전적으로 여섯 개의 발가락인 이 고양이들은 그 많은 관광객들을 개의치 않고 헤밍웨이의 침대를 유유자적 누리고 있었다. 그 고양이들이 이 헤밍웨이 집의 주인인 셈이다. 이층에서 발코니로 나서니 바로 건너편에 우거진 열대 수목 사이로 키웨스트의 하얀 등대가 우뚝하다, 야자수와 종려 그리고 각종 열대식물이 우거진 넓은 정원은 참 아름다웠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 내가 정원을 둘러보다가 한 티브이의 여행 프로그램에 나왔던 덩굴같이 정원길에 늘어진 야자수를 발견했다, 마치 객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집필실인 별채와 수영장을 돌아보고, 미쳐 보지 못한 본채의 실내를 다시 찾아보고는 다시 이층 발코니에 섰다. 바로 담 너머에 헤밍웨이가 술에 취하면 보고 집을 찾아왔다는 그 유명한 키웨스트의 등대가 거기에 서 있었다, 거기 서서 그 흰색의 등대를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It's stupid to give up hope, and I believe that, not only that, is a sin”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는다.노인과 바다에 남긴 이 명문장은 그의 불멸의 명언이다. 지금도 세인들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언에 감명을 받고 영감을 얻으며, 그 말을 등대로 삼아서 삶의 역경에 굴하지 않고 일어서고 있다. 이런 그가 1961년 아이호다에서 예순 하나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이렇게 빛이 된 사람이 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종군 기자로, 참전에, 여러 번의 죽음의 문턱을 넘고, 네 번을 혼인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종횡무진했던 그의 삶과 글로 추구했던 그의 희망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좋아하던 낚시와 저작 활동, 부와 노벨 문학상의 명예와 국민적 인기로도 그는 채워지지 못했을까? 문학과 예술은 이렇게 비범하거나, 통상적인 삶의 형식을 깨뜨리거나, 또는 비극적인 삶에서만 잉태하는 것인가? 작품과 영혼과 삶은 영원히 동일할 수 없는가? 인생의 성취와 명리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 이래서 복음은 화급한 것이며, 이것이 세상에서 비생산적으로 여기기도 하는 신학과 목양이 필요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헤밍웨이가 말한 희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문학은 지금도 살아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부귀와 영달보다, 문학과 예술을 꿈꾸는 건 어떨까? 저 호머는 지금도 세인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 숫 한 왕후장상, 부호들은 누가 알며, 그들의 권세와 부귀영화는 아예 그 종적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문학과 예술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문학과 예술보다 영생의 복음을 추구함이 더 좋을 것이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할뿐이기 때문이다, (전 12:12) 헤밍웨이 집 발코니에서 아름다운 정원과 어두운 밤 항해를 지로 하는 등대를 보며 스쳐간 생각들이다.

 

- 키웨스트의 낙조 퍼온 사진-

그렇게 헤밍웨이 집을 탐방하고, 근처 시내를 걸어보고는 서둘러 키웨스트을 떠났다. 범선을 타고 즐긴다는 키웨스트의 바다가 불타는 유명한 낙조도, 이름난 관광지들, 심지어 그 비취 빛 아름다운 키웨스트의 바다에 발 한번 담그지 않은 채로.....! 인생에게는 언제나 시간은 짧고,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전부를 누리는 것보다 남기는 것이 더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키웨스트에 추억 하나만 남기고 미련 없이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섬 키웨스트를 떠났다.

 

키웨스트에서 나오는 길

키웨스트로 들어오는 길 자체가 관광이라면, 나가는 길도 그러하다, 게다가 그날 오후는 쾌청했다, 플로리다 키즈의 비췻빛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버시즈 하이웨이에 올라 서쪽 플로리다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도로 좌우 바다로 자잘한 맹그로브 숲들과, 흩뿌려진 듯한 작은 섬들을 보며 달리다가 한 곳에 이르니, 대서양 쪽에 허리케인으로 유실되어서 폐쇄된 채로 오랜 세월 바람과 바다에 풍화된 녹슨 철교가 건너편 섬을 향하여 나가다 끊어져 있었다. 저 기찻길이 1912년에 본토 마이애미와 키웨스트를 이은 처음 길인 낭만의 키웨스트 해상 철도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달그림자가 비친 밤바다의 키웨스트 해상 철로 위를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사진이 있었다. 그 시절 이 망망한 비췻빛 바다를 가르는 키웨스트 해상 철길에 검은 연기와 하얀 증기를 구름같이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 기관차를 타고 이 바다를 달리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었을까?

 

- 리틀 덕에서 마라톤 방향 그날 이렇게 바다가 하늘 보다 더 푸르렀다 -

그곳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그 길고 긴 세븐 마일 브리지에 이르렀다. 거기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오히려 그 하늘보다 더 푸른 비췻빛 바다가 만난 수평선으로 세븐 마일 브리지가 뻗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 빛이 더 하늘 같았다. 장관이었다. 여기서 더 머물다 지는 해에 붉게 물드는 저 바다를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생각이 문득 나를 황송하게 했다. 내가 섬기는 나의 주인께서는 삼십 평생에 그 좁은 팔레스틴을 벗어나신 적이 없으셨는데, 종인 나는 여기 미국 하고도 플로리다 키즈의 세븐 마일 브리지까지 왔다. 그분을 태운 나귀처럼 그 분 덕에 누리는 호사가 아니든가?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저 수평선과 같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데까지 낮음을 찾아 가는 것이 그 분을 따르는 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 이 아름다운 바다에 저 검은 기름은 웬걸까 아쉬웠다 -

그 긴 세븐 마일 브리지를 지나 섬 몇 개를 더 건너, 콘치 케이라는 아주 작은 섬 끝자락의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 망망한 비췻빛 바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이다. 하늘은 맑았으나 바람은 대단했다, 도로변 숲을 빠져나가 검게 물든 콘크리트로 된 긴 제방에 섰다. 거기 비췻빛 바다가 대서양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버시즈 하이웨이를 따라서, 그 빛깔 고운 바다에 선 전주가 건너편 쪽으로 아슴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담으려고 폰카를 드니 바람이 어찌 센지 손으로 잡은 폰카가 날아갈 지경이었다. 이곳의 허리케인의 위력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느덧 점심때가 이미 기울었다. 롱 케이 비아 덕을 건너며 시장기가 돌았다. 섬 두어 곳을 지나서 키웨스트로 들어가는 길에 점심을 했던 아일라 모라다에 이르러 헤들리 아내 킴이 소개한 식당을 찾아들었다.스퀘어 그루퍼 이슬라 모라다"는 겉보기는 그냥 허술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는 외관과는 다른 세계였다세련된 인테리어, 그리고 맞은편 통유리로 내다 보이는 숲에 쌓인 좁은 만에는 양쪽으로 들어선 보트 보관소와 바다에 요트들이 가득했다. 보트를 대여하거나 보관하는 그런 회사의 식당인 모양이다. 그리고 밖으로는 계단식으로 넓은 데크를 설치하고 비치 파라솔을 두어서 만을 감상하며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현대식 음식을 내는 바와 그릴을 겸한 곳인데, 식사는 괜찮았다. 이채로운 건  " 福壽康寜"이라는 글귀가 인쇄된 포장지에 든 젓가락을 내고 있는 거였다. 양식에 젓가락이라니! 식사 후에 음료를 가지고 데크로 나와 잠시 휴식을 하고 길을 떠났다,

 

- 서프라이즈 호를 건너는 US1 도로 풍경 -

이윽고 차는 키웨스트로 들어가는 첫 섬이자, 나오는 길의 마지막 섬 키 라고스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US1도로로 키 라고스의 서프라이즈 호를 건너 마치 실타래가 길게 늘어진 듯한 섬을 따라가는 길을 달렸다. 서프라이즈 호를 건너서자 거기는 맹그로브 숲의 바다랄까? 길 양편으로 무성한 맹그로브 숲이 망망하고, 그 숲 사이 청록빛 수로들에 보트들이 떠있게 평화로웠다.  그 아름다운 맹그로브 섬들을 지나 차는 플로리다 반도 남단 동쪽의 습지공원 서던 글라데스에 들어섰다. 거기서 US1 도로는 망망한 지평선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키웨스트에서는 물의 수평선을 향하여 달렸다면, 플로리다의 습지에서는 땅의 수평선으로 달린 셈이다. 우리는 홈스태드에 이르러 US1도로를 이별하고, 다른 길로 북행하여 41번 도로를 만났다. 41번 도로는 플로리다 반도 동쪽 마이애미에서 서쪽 템파를 잇는 도로로 "타마이애미 트레일"이라 부른다. 이 41번 도로로 플로리다 반도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다 북행하여 밤이 늦어서야 템파에 도착하여 그날의 여정을 마무리했다이렇게 우리는 키웨스트에서 나왔고, 거기서 대망의 키웨스트 여행은 끝났다.

 

뉘엿 뉘엿 해지는 일망무제의 지평선에 서는 것, 그날 나는 저 망망한 에버 글라데스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이 원을 풀었다. 아마도 이 길을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올 기약 없는 그 망망한 지평선은 차츰 저물어 가고 나는깊은 여수에 빠져들어갔다. 내가 여기까지 걸어 온 길,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약관 이십 중반에 겁도 없이 목회를 시작한 이후, 이 나이 되도록 여행으로 주일 강단을 비운 적이 없다. 생전 처음 두 주간의 여행을 했고, 두 주일 강단을 비웠다. 이렇게 강단을 비웠다고 강론의 짐을 벗은 건 아니다. 미국에서 첫 주일에 두 번의 강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단 하루도 강론을 생각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씀은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역자들의 벗을 수 없는 영광의 십자가이다.

 

어느덧 내 정년의 해도 저 에버 글라데스 지평선 위의 해와 같이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내 남은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그리고 그 후에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지, 기다리는 교인들도 눈에 밟혔다, 그래선지 그날 어두워진 그 타미이애미 트레일을 가는 내내, 헤밍웨이가 눈에 밟혔다. 무릇 인생이란 저 야곱처럼 그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행이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날 밤을 템파에서 지내고 북상하여, 미국에 오던 날 같이 밤비 내리는 애틀랜타공항에 아들을 홀로 두고 돌아왔다. 출국장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안았다, 아버지를 안은 아들의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그동안 몹씨 고달프고 외로왔던 모양이다. 팔년여 고학생활이 때론 얼마나 막막했을지, 그 아들을 안고 기도하는 애비의 마음도 저려왔다. 언제나 출발에는 이별이 따르지만 이별은 슬픔을 동반하는 내일을 향하는 출발이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겨울비가 여름 소나기 내리듯 하는 애틀랜타 국제공항에 힘들었을 그 아들을 이별하고 우리의 사역과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저 키웨스트로 가고 오는 길의 그 고운 비췻빛 바다 빛이 내 마음과 우리 가족사를 추억의 쪽물로 그 바다보다 더 곱게 물들였다. 아! 키웨스트로 가는 길과 그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저 에버 글라데스의 해지는 지평선은 영원히 그리울 것 같다. 

 

- 타마이애미 트레일 마이애미에서 템파를 잇는 동서 횡단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