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성탄 그 임마누엘의 이적

아브라함-la 2021. 12. 5. 15:58

021,12,5, 주일

본문 : 마1:18-25

말씀 : 라인권목사

성탄을 앞두고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또 교회를 통해서 오미크론 코로나 변종이 유행하게 된 걸 아프게 생각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가 반드시 생각할 주제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의 목적을 구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태도 예수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탄의 목적에 대한 마태의 이해는 우리와 좀 다르게 임마누엘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것은 선지자로 말씀하신 그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즉 마태는 성탄은 임마누엘을 이루는 것이며, 구원은 이 임마누엘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는 이 임마누엘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셔서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시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이 임마누엘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이란 죄로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정상적인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게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임마누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확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발전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걸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관계가 완성되어 영화라고 하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계21:3,4절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고“ 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임마누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탄 즉 성육신은 언약대로 임마누엘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 성탄의 목적에 대한 마태의 가르침입니다.

 

불가능한 임마누엘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이 임마누엘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임마누엘은 존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 즉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물질은 유한하고 변하고, 부패하며 가사적인 존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생불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리고 신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조물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어떻게 창조가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임마누엘은 감정적, 정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노숙자를 도울 순 있어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이는 없습니다. 정서, 감정적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그 앞에는 해와 달도 명랑치 못합니다. 이런 분이 어떻게 만물보다 부패한 사람과 동거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은 양과 이리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질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마태가 여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태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임마누엘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이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을 이루게 하는 두 가지 하나님의 이적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

그 첫 번째 방법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마누엘즉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사람이 되시는 이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철학으로는 하나님이 제한적이고, 사악하고, 사멸하는 물질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교회 안의 엘리트 신자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신앙심의 정도는 영육의 갈등에 대한 느낌에 비례합니다. 말하자면 신령할수록 육신이 영의 원수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육신, 사람이실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가현설이라는 이단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논리 체계로는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임마누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임마누엘이 되는 이 불가능이 가능이 되었습니까? 이걸 가능케 한 이적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구원자로 주시는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라고 성탄을 하나님의 사랑이 이룬 이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 발작이 자기를 낮추고 비워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사랑의 이적입니다. 하나님이 종의 형상을 입으신 것이 이적이요. 고난 당하신 것이 사랑이 이룬 이적이며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이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초월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보어 전쟁 때 폭탄이 떨어지자 한 여인이 도화선을 입으로 물어뜯어 냈습니다. 이 여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해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은 내 아이를 살리려고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초월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와 신분과 감정을 초월하여 성육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임마누엘의 은총은 이렇게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이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이 사랑을 감사합시다. 우리는 이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구합시다. 이 믿음이 사랑으로 임마누엘이 되시는 이적을 경험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을 이룬 두 번째, 이적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가능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다는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걸 마리아도 믿을 수가 없었지요, 천사의 수태고지에 마라아는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했습니다.했습니다. 부정모혈이 아니면 잉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합리주의 신학에서는 동정녀 탄생을 비과학적으로 여기서, 탄생 신화로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런 비평을 합리적인 논증으로 변증한 이론들이 교회의 유산으로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난자만으로도 생육이 가능하다고 험증적인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변증도 동정녀 탄생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동정녀 탄생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걸 보여주는 말씀이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라는” 마리아의 말에 대한 천사의 대답입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1:35)즉 성령이 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룻을 덮듯이 아예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데 왜 못하십니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 위필드의 논증이 맞는 것입니다. 그는 성육신을 변증 할 때에 예수님은 본래 초자연적인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으로서 초자연적인 일들 소경을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신 초자연적인 분이시므로 그 초자연적인 분이 나실 때에 초자연적으로 오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이적입니다. 이 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렇게 초자연적인 것이며, 이적이고, 신비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롬 4:17).(4:17)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 이적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적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 자체가 이적이요, 신비입니다. 성육신보다 임마누엘보다 더 큰 이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이적이요, 죽으심이 이적이며 부활이 이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림절에 우리는 마치 이적이 없었던 것 같이 이적을 보기를 원하고, 이적을 구할 것이 아니라, 주신 이적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적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이걸 주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임마누엘의 이적을 현재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임마누엘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이 역사의 한 시점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현재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인생으로 받아 드릴 때에 그 몸에 성령으로 예수가 잉태하는 임마누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마리아 같이 믿고 신뢰할 때에 임마누엘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이적이 일어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시험 중에서 임마누엘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을 고백하시므로 임마누엘의 이적을 경험합시다. 고난과 역경에서 이 신앙을 고백하시면 이레, 닛시, 라파, 샬롬이라는 임마누엘의 이적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변종으로 유례가 없는 대림절을 맞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때에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바라봅시다. 이 임마누엘께 의탁합시다. 그러면 이 어려운 때가 임마누엘 이적을 경험하는 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경험이 우리 인생길을 임마누엘의 이적 가운데 있게 할 것이요, 마침내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를 덮는 영원한 임마누엘에 이르는 기적을 보게 한다고 믿습니다. 이 임마누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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