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

아브라함-la 2021. 11. 28. 19:45

 

 

021,11,28, 주일

본문 : 마1:1-17

말씀 : 라인권목사

샬롬입니다. 지난 주간은 한 사람의 죽음은 인생의 시금석이라는 것을 새삼 깨우치는 주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애도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기쁨이 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웃이 내 죽음을 어떻게 여길지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삶은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죽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믿습니다.

 

목사는 선지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일도 해야 하지만, 어느덧 한 해가 가고 대림절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력으로는 새해를 맞는 셈이고, 주님을 대망하고, 맞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성탄절과 주님을 맞을 준비로 마태복음의 앞부분을 공부하며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본서를 기록한 마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성경이 약속한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려고 이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복음서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아브라함에서 다윗 왕에 이르고,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서 이렇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니 이 예수님이 우리 왕이시다. 이런 겁니다.

 

왕이라고 하면 외려 조롱당할 이미지

그러나 우리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말씀을 뜯어보면 에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 오히려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요, 만왕의 왕이시라는 이미지와 모순됩니다. 왕의 이미지는 권세와 영화이며, 그 권세로 군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를 왕이라고 하지만, 그가 말하는 다윗의 왕국과 다윗 왕가는 586년 전에 망한 나라입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해서 종이 되어, 페르시야와 헬라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은 철의 제국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건, 요셉이 소위 로열패밀리라는 거죠, 그 로열패밀리에서 왕위 계승자 1순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름 없는 무명의 나사렛 목수입니다. 이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충격입니다. 이것은 토픽감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요셉을 로열패밀리가 아니라 목수로 알았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마저도 다윗의 자손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왕이라는 것과 예수가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을 때에 로마병정들이 예수를 조롱한 것과 같은 조롱을 받게 할 말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조롱하기 위하여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운 후에 예수의 머리를 때리면 유대인의 왕이여 너를 때린 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마태가 예수가 왕이라고 하면서 그가 다윗의 왕통이며 요셉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이걸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픽 웃으며 그게 무슨 왕이냐? 참 대단한 왕이시네! 이렇게 비웃을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가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아들로 다윗의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 왕의 이미지에 모순이 되고, 제게 무슨 왕이야! 이렇게 비웃을 터인데도 마태가 예수를 망한 다윗 자손 요셉의 아들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게 진짜 메시야 만왕의 왕의 이미지요, 그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속하시는 영적인 왕

우선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한 이미지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날 백마를 탄 초인이 홀연히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군림해서 저 로마를 몰아내고 영광스러웠던 다윗의 왕국을 회복해 주기를 열망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무명의 목수의 아들로 오십니다. 메시야 왕이라는 이가 보호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한 아기로 출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와 예수의 나라가 세속적인 것이 아니요, 창칼로 그 나라를 이루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대속하여 저희 죄에서 구속할 왕이십니다.(21) 따라서 예수에게는 세상 권세와 영화가 아닌 나사렛 목수의 아들의 이미지가 어울립니다. 요셉이 무명의 목수인데 로열패밀리라는 것이 예수의 왕 됨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이 메시 야성 구속성을 오롯이 드러내 준 것입니다. 마태는 이 구속이신 왕 예수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여 예수께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생과 하늘의 것을 구하러 오십시오, 이 예수를 만나고 이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받을 때에 비로소 죄의 결과와 그 영향인 소위 인생고에서도 예수님께서 구원이 되시는 은혜와 이적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비하 하신 왕

따라서 마태가 이렇게 예수가 다윗의 왕통인 요셉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속량하시는 구원의 권세를 베푸시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는지를 오롯이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취하시지 않고,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시되, 여자에게 나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자가 무명의 목수로 전락한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빌 2:6-8)이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 죄를 담당해서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높이셔서 모든 사람이 주라 일컫게 하시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이렇게 하나님이 굽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까지 지기를 굽혀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굽히시고 낮추어 주셨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기독교의 특색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지고하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리,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죄인들, 세리와 창기의 찬구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이 은혜는 자기를 예수의 구속하신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영적 파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잘 보여 주는 이가 나만입니다. 나만이 고침을 받아야 할 문둥병자가 아닌 군대장관으로 나올 때는 고침을 받지 못하지만, 고침받을 불쌍한 문동 병자로 알 때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만이 문둥병자가 아닌 군대장관으로 나온 것이 같이 나올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을 불쌍한 문둥병자로 나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낮아진 예수를 만나는 믿음입니다. 이번 대림절에 이 은혜로 고침 받을 죄의 문둥자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므로 이번 대림절과 성탄절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오시는 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때에 오심

그리고 마태가 왕이신 예수께서 요셉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구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때가 어떤 때인지를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때에 오셨습니까? 무명의 나사렛의 목수 요셉이 다윗의 자손, “로열 패밀리라는 사실은 찬란했던 다윗의 왕국이 식민지의 무거운 멍에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자가 무명의 목수로 전락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이던 때에 다윗의 집과 그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마침내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삶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때가 그리스도가 구원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소망이 끊어진 절망의 때에 오시며 만나주십니까? 그것은 우리네 인생은 자기라는 자신이 황무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나만이 문둥병이 들지 않았다면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기나 하겠습니까? 문둥병으로 자기가 황무하여 절망적이 되니 비로소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이것이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네 인생을 욥과 같이 황무지로 만드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가 구원자로 오시는 시간은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때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시간이요, 예수를 구원으로 만나는 은혜와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이 암울하고 절망적일 때 믿음은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는 겁니다. 인생 최악의 때는 예수께서 구원자로 내게 오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상황이 최악일 때는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권능을 나타내시는 은혜가 임하고 구원의 기적이 임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암울하고 절망적일수록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이 믿음이 암울한 지금 예수께서 구원으로 오시는 성탄을 현재적으로 경험케 할 줄로 확신합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이렇게 예수가 다윗의 자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왕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왕 되심을 오롯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신령한 대속의 왕이 십니다. 대속의 왕이 되시려고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왕이십니다. 이 왕이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때에 오십니다. 우리 인생의 죄와 실패에서 이 예수를 봅시다. 이 예수를 보고 나만과 같이 고침을 받아야만 할 불쌍한 죄인으로 예수를 영접합시다. 이것이 절망의 시간이 구원의 시간, 예수가 내게 오시는 나의 성탄절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예수께서 나의 구주, 나의 왕이 되시도록 예수님께로 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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