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5,5, 어린이 주일
본문 : 시127:3-5
말씀 : 라인권목사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 있음을 축하드립니다. 신록의 계절, 오월 가정의 달을 맞았습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가정과 삶이 오월같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제 우리 자녀들이 다 성장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자녀를 생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자식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이 팽창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서 자식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봉독 한 시편은 솔로몬의 시로 한 가문, 사회와 국가, 한 개인의 성취도 사람의 수단이나 노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임을 노래하는 잠언적인 시편입니다. 이 축복의 한 사례로 든 것이 “자식”입니다.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식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축복이다. 이게 자식에 대한 성경의 가치관입니다.
자식에 대한 인식
이것은 먼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식을 기업과 상급으로 비유했습니다. 기업은 이스라엘이 제비 뽑아 받은 땅으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서 축복으로 주신 분복입니다. 그리고 상급이란 히브리 말 “샤카르”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축복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창15:1의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상급이 샤카르입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샤카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모든 복을 총칭합니다. 시인은 자식이 축복이라는 같은 말을 단어만 바꾸어서 두 번을 반복한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자식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로
첫째, 자식을 자연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부로 지으셔서, 창조 이후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자식을 사람의 자연적인 은밀한 본능에 의해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자식을 사람의 의지대로 둘 수 있고 안 둘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1980년대에는 ‘둘도 많다’라며 한 자녀 갖기 운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지금 우리 한국은 OECD국가 중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산아제한 정책이 자식을 사람의 본능과 의지의 산물이라는 가치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가치관 때문에 저출산 대책은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식이 인간의 본능의 소산이 아닌 하나님의 지으신 바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 10:10,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젓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니 아니하셨나이까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자녀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분명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 아는 우리 기독교인들조차도 실제로는 자녀를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부부의 행위에 의하여 태어나고, 의지에 따라서 조절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우리 한국교회는 산아제한 정책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낙태를 용인한 겁니다. 한국교회는 산아제한과 낙태에 대해서 한 번도 목소리를 낸 적이 없습니다. 이런 한국교회가 지금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조소를 금치 못할 일이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정치의 도구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을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람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요, 불신앙입니다. 산부인과 협회에 따르면 불임률이 20% 정도로, 이는 5쌍 중 1쌍이 불임을 겪는 중입니다. 자식은 사람의 마음대로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식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하는 가치관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담이 아닌 축복으로
그리고 자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자식이 부담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실제적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나라에서 산아제한 정색을1962년에 시작해서 1994년에 폐기했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가 자리를 잡은 것은 70-90년대입니다. 이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 소위 베이비 붐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대가 아니었으면 한강의 기적은 없는 겁니다. 자식이 없는 부와 명예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을 부담이 아닌 축복으로 아는 가치관을 확립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건 내 몫에 태인 복으로 알라는 겁니다. 어떤 자식이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딸도, 아들도 잘났거나 못났거나 건강하지 못해도 내 맞게 주신 선물로 감사합니다.
자식으로 인한 행복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둘째, 자식을 인한 행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식하는 가치관을 가지라는 겁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용사에게 잘 닦인 좋은 활과 화살은 든든함과 기쁨입니다. 이렇게 자식의 닦여진 온유함과 선한 성품이 부모의 기쁨,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자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에서 자녀에게 온유하고 선한 성품 “유게네이아”가 없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했습니다. 유게네이아가 없는 자식은 우한과 눈물의 자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유게네이아가 부모의 기쁨이며 행복인데 이 행복을 시인은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걸 몰라서 열정이 지나쳐 교육한다며 자식의 기를 꺾습니다, 이걸 몰라서 하나님이 주신 유게네이아를 죽입니다. 이걸 몰라서 자녀가 잘 된 것을 자신의 공로로 알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사람의 심성은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만물보다 더럽고 부패한 것이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의 “유게네이아”의 행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압시다. 이것이 기도하는 부모가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자녀는 중생하여 예수님의 마음의 자녀가 되어 화살같이 부모의 기쁨과 행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성공의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셋째, 이렇게 자녀의 "유게네이아"가 행복이라는 것은 자식의 성공을 이 세상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식하라는 겁니다. 칼빈 선생은 5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자녀에게 가져야 할 소망이 비열한 자들에게 통제나 압제를 받지 않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거나, 포악한 세력을 갖지 않고, 공의를 행하며, 기쁨으로 율법에 순종하여 살고, 힘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무슨 말입니까? 성공 자체가 성공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신앙적이어야 성공이라는 는 겁니다. 왜. 정상에 올랐지만, 이 땅에 해악을 가져오는 성공자, 출세자들이 많습니까? 입신양명 자체가 성공인 것 같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모가 출세해도 불의하면 실패로 아는 부모라면 자식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식 성공의 기준을 세상적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아는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기쁠 것이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닦여진 선한 품성이 용사의 화살입니다. 이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며, 부모의 무장이며, 부모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성공을 세상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와 천국을 기준으로 하는 가치관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세대에 사탄이 가장 성공하고 있는 분야가 자식입니다. 이 말씀으로 이 사탄을 발로 밟기를 축복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식의 행복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식의 유게네이아를 축복으로 알고, 유게네이아를 성공으로 압시다. 자식을 이렇게 아는 부모에게 이런 자식을 그 전통에 가득하게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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