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들보 그 인간의 사악함

아브라함-la 2024. 6. 11. 08:40

024,6,9, 주일

본문 : 마 7:1-5

말씀 : 라인권목사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사중계획 안에서 이번 주도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하늘을 보면 윤동주가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했는지 알 듯합니다. 하늘이 하나님 앞에 서라는 뜻도 있지만, 시인은 티 없이 맑은 하늘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티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이 괴로웠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티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아일러니가 있습니다. 티 많은 인생이 타인의 티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티를 찾아내고 그것을 비난하는 일에 열중하고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티를 찾고 비난에 열중하는 세상

요즘 가수 김호중의 일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청소년들의 우상이 된 김호중이 음주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하고, 운전자 바꿔치기를 하여 자기가 고용한  직원에게 처벌을 받게 하려고 한 일은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보도는 김호중의 죄가 아니라, 김호중이라는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서 그 인격을 비난하는 데 열중입니다. 고교 시절 학폭이었다. 방송사 PD들도 내놓은 사람이다, “치가 떨린다” “깝족대다가” 브런치에 글을 쓴 사람은 “특히 기분 나쁜 것은 성공하니 3억짜리 밴틀리 타는 것이다.” 이런 비난의 돌팔매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비난의 영  인간의 사악함 대표적 사례

오늘의 이 유명한 본문은 이 비난의 정신에 대한 우리 예수님의 분석과 대책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제 눈에 들보를 두고 형제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는 무지하고 사악한 존재다. 외식하는 자여, 남을 비판하거나, 고치려면 먼저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서 밝은 눈으로 타인의 티를 빼라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인 심판으로 들어가는 7장에서 딱 하나, 비판의 정신을 들었을까요? 그것은 혀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시금석이자, (마 12:34,35) 모든 죄의 근원으로 타락한 인간의 사악함의 대표적 사례이기 때문입니다.(약 3:8) 이 비난의 영을 주님은 들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비난의 정신, 비난의 영, 즉 들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비난의 영 들보는?

첫째, 타인의 죄와 실패를 비난하므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들보입니다. 마치 자기를 영적 엘리트로 아는 이들이, 자기가 정통 교리를 말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아는 것 같이 비난하는 것이 자기 의로움으로 알아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들고, 넘어진 자를 짓밟고, 충분히 비참한 자를 비참이 무엇인지 배우게 합니다. 인간이 이토록 사악합니다. 내 속에 이 사악함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횡횡하는 비난에서 이 사악함을 보는 이는 복 있나니, 저는 애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타인의 죄와 실수, 실패와 불행을 바라고,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들보입니다.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티를 찾다가 발견하면 기쁨이 충만하여 비난하고, 동네방네 나팔을 붑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기쁨을 감추고 사랑을 빙자해서 지적하고, 충고하고, 선생질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걸 로이드 존즈는 “악질적인 만족”이라고 했습니다. 이 끔찍한 악이 내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 횡횡하는 비난의 영들에서 내 안의 이 끔찍한 자기를 보고 소스라치는 이는 복이 있나니 저는 그 자기를 십자가에 못을 것입니다.

 

셋째, 자기의 죄와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의 죄와 허물에는 엄격한 것이 들보입니다. 성추행으로 사임하고, 개척한 목사가 ‘흠 없고 깨끗하기만 사람은 재수 없고, 자기 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이 인간적이고 은혜가 있다’ 고 설교합니다. 몇 번을 이혼하고, 간음한 사람이 동성애자 비판하는데 열을 내며 자기 의롭게 여깁니다. 심지어 자기 죄를 감추려고 자기가 정의의 사도인 양 비판합니다, 이게 들보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사특한 겁니다. 회자되는 비난의 영에서 이 위선을 보는 자는 복 있습니다. 저는 남의 죄가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만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을 알고, 힘써 자기 죄를 버려 자기를 성결케 할 줄로 믿습니다.

 

넷째, 시기와 질투로 책을 잡고, 훼방하고, 죽여서 매장하려는 것이 들보입니다. 바로 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고 못 박은 죄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것을 알았습니다, (마 27:18) 주님의 사역으로 그들의 오류와 무지와 위선이 드러나자, 그들의 마음에 예수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해서 예수의 이적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고 말로 훼방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2:34,35)

 

이 들보가 예수를 십자가로 보낸 것 같이, 지금도 이 시기, 질투라는 들보가 망신을 주고, 매장시키려고 비난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악질적이며 사특하며 사악한 겁니다. 이 사회에 떠도는 야비한 비난의 영들에게서 이 악함을 보는 이는 복이 있나니, 저는 이 무섭고 가증한 죄의 심판에 이르지 않게 자기를 구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도 용납 못하는 세상을

그러면 이 사악한 비난의 영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를 봅시다. 이 비난의 영이 악인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이 의인도 용납하지 못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김호중 사건에서 보듯 벌떼같이 일어나 퇴출하고, 처벌하라고 합니다. 이 나라가 이렇게 정의로운가 싶습니다. 그러니 의인은 환영을 받을 것 같지만, 세상은 악인을 용납 못 하는 것 같이 의인도 못 참고, 용납 못합니다. 이것이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배척당하고 돌로 치게 한 겁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이를 입증합니다. 불의하고 부패한 바벨론의 대신들은 의인 다니엘의 존재가 불편하고, 정죄가 되므로 의인 다니엘을 죽이려고 한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악인의 악행에 위험을 느끼고, 나는 선하다는 자존감을 상하게 해서 악인을 용납 못하고, 동시에 의인은 불편하고 정죄가 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면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의인을 배척하고 죽이는 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위선적이고 사특합니다.

 

이렇게 악인도 용납 못하고, 의인도 용납 못하는 이 들보가 세상을 개혁하는 것을 참지 못하게 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이 그랬습니다. 정조의 개혁도 마찬가집니다. 인류역사에서 개혁은 항상 거센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이 들보가 개혁이 무산되게 하고, 미봉에 그치게 해 왔습니다. 지금 노무현은 가장 정직한 대통령으로 추모되고 있지만, 그의 재임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노인들마저 그놈 그놈 했습니다. 이 비난의 영 때문에 개혁이 안 됩니다. 이 악이 사회를 개선이 아니라, 개악하고 있고, 이 악이 통일을 못 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죄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혁명을 하신 것이 아니라, 구속의 피를 이 죄를 구속하신 겁니다. 이게 우리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할 이유입니다. 복음 만이 죄를 고치고, 세상을 새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비난의 영

그런데 문제는 이 비난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날 때 더욱 사악해진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이 세상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 팔복의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난의 영이 얼마나 사악하고, 비인간이고 비신사적이며 비기독교적이고, 심판받을 죄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이 비난의 영에 사로잡혀서 말합니다. 비난의 영은 믿는 자에게서 더 위선적이고, 더 끔찍합니다. 이것이 전도문을 막게 하고 있습니다.

 

이 입술의 문제는 바울 서신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야고보 사도는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냐고 했습니다.(약 3:10) 이 비난의 영 때문에 형제가 실족하고, 교회가 분열하며, 여린 사역자들을 낙심시키고, 좌절하여 사역에서 물러나게 하며, 거룩한 진리와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들보는 더욱 사악한 겁니다. 따라서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 안에 난무하는 비난의 영에서 이 자기를 봅시다. 내 안의 이 끔찍한 들보가 있음을 보고 자기에 절망하고, 십자가로 나갑시다. 그리고 거기서 심판을 면치 못할 내가 보혈의 공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 자로 확신합시다. 그리고 이 비난의 영에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할 것을 결단하고 주님을 따릅시다. 예수님을 따르므로 예수님처럼 말해서 우리가 말하면 사람이 살아나고, 우리말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게 하는 멋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장로회 신학교와 한국신학교가 분열할 때의 일입니다. 얼마나 말들이 많았겠습니다. 그때 장로회 신학교가 남산에 있었습니다. 박형룡 박사의 수업 시간에 박 목사님이 들어오시자, 수강하는 학생들이 박 목사님에 대한 박목사님에 대한 비난의 말들을 누가 이렇게 비난하고, 누구는 이렇게 한다고 일러드렸습니다. 이 말을 한동안 듣고만 계시던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다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수업합시다.” 그리고 강의를 진행하셨습니다. 강의실의 학생들이 다 감동을 받았답니다. 이게 박형룡 목사님을 성자로 알게 한 겁니다. 입술이 주님을 닮은 겁니다. 주님처럼 말씀하신 겁니다. 이 사람이 젠틀맨, 신사입니다. 이게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우리의 사악한 비난의 영에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고, 예수의 영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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