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

청문회 잘 가고 있다!

아브라함-la 2014. 7. 1. 21:57

 청와대가 난감해졌다.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가 연달아 청문회에 가지도 못하고 낙마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통령의 논평은 참 아리송하다. “청문회에 가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총리지명자가 적임자인데 청문회가 못간 것이 유감스러운 것인지. 총리 지명자가 부적격이어서 청문회에도 못 간 것이 유감인지. 아니면 너무 가혹하게 평가해서 청문회에 가지 못하게 한 여론과 야당이 유감스럽다는 것인지, 자신의 인사가 잘못 된 것이기 때문에 유감인지 영 모르기 때문이다.

 

 

세간에 황희 정승이 와도 통과 못할 것이라느니, 심지어 비민주적이라느니, 말들이 많고 심지어 여당은 청문회제도를 손보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모두 여당의 자업자득이 아닌가? 자기네가 만들고 자기네가 상대를 잰 자로  자기네를 재는 것은 가혹하게 여기는가?  그것도 야당은  자기네가  한 것 같이 주민법  등은 거론도 않는데 말이다.  성경은 남을 판단한 그 판단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현재 청문회가 잘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내가 청문회가 잘 가고 있다는 것은 비인격성이나 정파주의 같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청문회가 결과론적으로 “공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청문회에 나와 망신만 당한 인사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네들은 대개 부와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공직이라는 명예”까지 얻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편법과 부정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여기에 “공직”이라는 영예와 명예까지 소유하려고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인사들과 기득권들에게 지금의 청문회는 “공직”은 순전히 “명예”와 “국가와 민족에 헌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했다. 공직이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영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직은 개인의 영달이나, 부귀영화를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순전히 공익과 봉사만을 목적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수단을 목적으로 삼던 이들은 감히 공직이라는 명예를 꿈꾸어서는 안 된다. 의롭지 못하고 부정한 이들이 공직에 나가면 그 공직은 당연히 공익이 아니라 사욕의 도구로 전락하여 부정과 부패와 편법이 난무하는 특권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하고 불의한 이들이 공직을 구하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헌신과 봉사라는 목적을 잃은 선지자를 거짓선지자라고 부른다. 성경은 이들을 분별할 세부적인 지침까지 마련 두고 있다. 공직도 마찬가지다. 목민관이 아니면 가렴주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청문회 제도는 “공직의 명예”가 명예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더 높은 수준을 엄격하게 요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제발 돈과 권력이 전부였던 이들은 돈과 권력으로 만족하고 공직의 명예는 넘보지 말아주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공직에 나선 이들이 권력의 소모품이나 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자손의 영광으로 남게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