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5,22, 주일강론
본문 : 마13:5-6
말씀 : 라인권목사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길가와 같은 사람의 양태로 나타납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은 전도를 받지 않거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기보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요, 편협하고 왜곡된 진리지식에 사로잡힌 주관이 진리에 귀를 막는 길가의 사람이요, 사욕 때문에 가려운 귀를 긁어 주는 스승을 많이 그 귀를 진리에서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 길가입니다. 이렇게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이 길가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더 어두워지고 악해집니다. 그러므로 듣는 귀, 즉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 또 다른 양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것을 “돌밭에 떨어지매”라고 돌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
이것을 마태는 “흙이 얕은 돌밭” 누가는“바위 위에”(8:6)라고 했습니다. 이는 표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입니다. 밭 가운데나 밭가에 커다랗고 널찍한 바위돌이 있으면 잡초를 뽑아 두는 등 하여 흙이 조금 쌓이게 되고, 여기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나오지만 흙이 얕고 습기가 없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더위가 심해지면 누렇게 말라 죽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이 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씨”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는 “이들을 가리킴이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했고, 마가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4:16)라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씨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깨닫는 사람, 깨닫지 못하는 사람, 결실하는 사람, 결실하지 못하고 도리어 누렇게 말라죽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 기쁨이 이 사람의 첫째 특성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문제는 잠간 견디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이 왜 환난이 오면 즉시 넘어 집니까? 그래서 이 기쁨이 어떤 기쁨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
이 기쁨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 기쁨의 긍정적인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그 말씀을 만나고 받아드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요 양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만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을 만난 감격과 기쁨입니다. 출15:1-3절을 봅시다.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감격과 기쁨의 표출이 찬송입니다. 이 기쁨의 극치가 춤을 추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출15:20-21)이것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이스라엘의 영원한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 기쁨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잘 아는 합3:17-18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는 곡식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없고 없으며 없고 없을지라도 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기쁨은 창자와 입술이 떨리는 환난의 소식 앞에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16)전쟁의 소식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구원받은 결과도 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이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더라”(행16:34) 구원 받은 기쁨은 변화와 헌신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동력입니다. 이 기쁨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고서는 도무지 살 수가 없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 은 심지어 환난과 박해와 고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행5:41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공회를 떠나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의 말씀과 천국을 아는 기쁨은 채찍에 맞아도 기뻐합니다. 순교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쁨은 밭에 숨긴 보화와 좋은 진주 비유에서 보듯 전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 가치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쁨입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이요, 신자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미국에 맥 다니엘이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둘째 아들을 잃고 하루하루를 충격과 슬픔속에 지내다가 구원하시는 은혜와 그 소망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우리 찬송289장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후렴만 봅시다.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밀물이 들어오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해일 쓰나미가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홍수 때 홍수가 몰려오는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구원과 그 말씀과 천국을 받은 사람은 이 기쁨이라는 양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화평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기쁨은 천국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이라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 받았다고 하는데 이 기쁨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이 기쁨을 아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기쁨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기쁨은
이 돌 밭의 사람의 기쁨의 문제는 기쁨 그 자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일시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이 사람을 특징짓는 말씀이 “곧” 또는 “즉시”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즉시”기쁨으로 받되 “잠시 견디다가”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즉시 기쁨으로 받으니 “잠깐 견디다가” “곧”넘어진다고 했습니다.(4:17)누가는 “잠깐 믿다가”라고 하셨습니다.(8:13) 기쁨이 즉시, 곧, 잠깐 이렇게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위에서 본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의 말씀과 천국을 아는 기쁨은 전인격적입니다. 삶의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그래서 전천후적 입니다. 지속적이고 영구적입니다. 그런데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기쁨은 일시적, 순간적입니다. 믿는 것 같지만 단지 한 순간의 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 한순간의 일시적 감정에 불과할까요?
잠깐 믿는 믿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이는 것이 누가입니다. 눅8:13절을 다시 봅시다.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는 자요” 잠깐 믿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시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 일시적인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첫째, 중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에게 있었던 같이 믿음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벧전1:18,19) 셋째, 믿음은 항상 있고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입니다.(23,24)그래서 말씀과 함께 세세토록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이 잠깐 믿는 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는 것 같지만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잠깐 믿습니까? 듣고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천국의 말씀이 나갈 때에 깨닫는 경우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깨닫지 못하면 결실하지 못하고, 깨닫는 경우에만 결실합니다. 깨닫는 다는 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에서 보듯 모든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해서 믿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결실하지 못합니다. 즉 구원과 천국이 그 속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을 깨달아서 믿는 이는 백배 삼십 배가 됩니다. 깨닫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돌밭, 일시적인 믿음의 사람은 어떤 유의 사람이며 일시적인 믿음이 어떤 양태로 나타날까요?
돌밭에 떨어진 사람의 양태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을 흔히들 감정적인 사람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총신에서 가르친 신성종목사는 “양재기 신자” 양은 냄비 같은 사람라고 했습니다. 핸드릭슨은 부흥회에서 순간적인 충동,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아 믿음이나 변화나 헌신을 결심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한 순간의 감정에 그치고 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일시적인 믿음, 기쁨은 어떤 양태로 나타납니까?
우선 가장 근본적이고 대표적인 양태가 복음과 진리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증거가 즉시 기쁨으로 받되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지고 배반합니까? 그것은 그가 처음 복음의 구원의 진리를 받을 때에 전체적으로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만 귀에 들어오고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칭의, 자녀 됨 천국, 평강 기쁨 자유 이런 복음의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사죄는 회개를 요구합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 없는 모든 삶을 죄로 여기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칭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의로운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녀 됨과 천국은 순종과 환난이 요구됩니다. 처음 들고 믿을 때 이걸 다 듣고 받아드렸다면 그리고 깨달았다면 그는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각오했을 겁니다. 그렇게 했다면 환난과 박해가 와도 배반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진리는 빵과 다릅니다. 빵은 없는 것보다 반쪽이라도 있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다릅니다. 만일 코끼리가 반쪽만 있다면 없는 것보다 좋을까요? 심지어 전염병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이와 같습니다. 반쪽 진리는 진리를 죽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합니다. 반쪽진리는 온전한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약장수와 같이 반쪽 복음, 값싼 복음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복음의 긍정적인 면만 받아드린 사람, 결국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긍정적인 면만을 받아드리는 것은 그 사람이 구하고 소원하는 것이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들어도 자기가 원하고 관심이 있고, 선호하는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제자들 중에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구원과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이걸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메시야 왕이시다. 그 예수의 나라가 온다, 그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열두지파를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 이게 좋습니다. 이 말만 들리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로 가시니 헌금 훔치다가 결국은 은 삼십에 판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반쪽만 받아드리고 그래서 잠깐 기뻐하다 잠간 믿다가 순식간에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영적 취향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긍정적인 측면을 믿는 것은 그게 자기의 영적 취향에 맞고 만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것 같고 하나님과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적인 사람은 믿음을 지식으로 압니다. 감성적인 사람은 믿음을 감정이라고 고집합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믿음은 의지 실천이라고 고집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의 영적취향이 그것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헌신은 고상한 놀이에 불과 합니다. 교회에서 찬양대 안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할 때는 열정적인데 말씀 시간에는 못 견딥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으면 합니다. 싫으면 안 합니다. 이게 우상입니다. 자기에게 힘들고, 싫고, 괴로운 그 순간 끝입니다. 이게 돌밭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구원이 없는데도 구원이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기 십상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았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기쁨의 예배와 봉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 착각입니다. 실상은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 받았지 진리를 전체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할 뿐입니다.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고상한 종교놀음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천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천국과 그 말씀을 다 받아드리고 깨닫는 길은 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무엘이 잘보여줍니다. 사무엘이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만을 긍정하고, 다 받고, 다 순종하려는 자세입니다. 이게 깨닫는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말씀 앞에 서면 자기가 죽습니다. 자기라는 기준, 성향, 감정이 죽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마음을 기경하며 다 받아드리고, 다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을 받고 아는 기쁨이 물밀듯이 내 맘에 기쁨이 몰려올 것입니다. 없고 없어도 기쁘고, 환난과 박해도 기뻐하고, 기쁨으로 이기고 뚫고 나가는 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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