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5,15주일강론
본문 : 마13:3-9
말씀 : 라인권목사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기본적인 방편이며 양태가 말씀의 전파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천국이 임하는 것이 말씀의 전파에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 씨를 뿌리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 씨 뿌리자의 비유로 씨 뿌리는 사람들의 자아상을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이가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사람들은 다 주님께 속 했고, 사람이 뿌려도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하시지만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들의 길은 장미꽃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경우 백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되게 하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천국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이 소망으로 가야 합니다. 누물로 뿌리지만 기쁨으로 거두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뿌리는 자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뿌리는 자가 되기 만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주님이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는 자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제 이 씨를 뿌리는 자들이 나가서 뿌릴 때에 나타는 말씀에 대한 반응을 공부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씨를 뿌릴 때 말씀에 대한 반응
주님은 이 말씀의 반응을 네 가지로 밭에 비유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세 경우는 열매가 없고 열매가 있는 경우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별하면 두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는 경우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말씀이 전파되고 꼭 같은 말씀을 듣는데 어떤 이는 말씀이 열매를 맺고, 어떤 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그 까닭을 주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여부에 걸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하셨고, 23절에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열매가 있고 없는 두 가지이고, 열매의 여부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경우와 듣고 깨닫지 못하는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첫 번째 경우 인 길가에 떨어진 씨의 경우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길가에 떨어진 경우에서 주님은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씨를 뿌릴 때에 씨가 밭의 흙속에 묻혀야 싹이 나오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씨가 밭 옆 농로나 고랑 길에 떨어지면 단단한 길 때문에 씨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노출되어 있으면 새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이렇게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이 단단한 길가와 같아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면 사탄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첫 번째 경우에서 이 길가, 길 가와 같은 마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의 사람은
길가와 같은 마음의 사람을 흔히 전도를 받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입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은 분명 전도를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베스도는 바울에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행26:24)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26:28)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마터면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안 믿으려고 합니까? 편견과 오해가 길가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이유와 논리와 철학을 철통같이 세워둔 것이 길가입니다. 심지어는 까닭 없는 적개심으로 반대하는 이도 있고, 죽어도 싫다는 사람들, 이런 완악하고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 길가입니다. 이게 자기, 우상입니다. 이렇게 전도를 받지 않은 사람, 복음과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이 사람들이 분명 길가와 같이 말씀을 받을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누구를 대상으로 했습니까? 말씀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고, 이적을 행하면 귀신이라고 훼방하면서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숨기시려는 목적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천국과 성경을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요.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게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길가와 같다고 하신 사람은 전도를 받지 않거나, 성경을 모르고, 읽지 않거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겨냥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연조도 있고, 성경과 신학을 잘 안다고 자부 사람들이 실상은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겨나가는 천국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을 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런 길가와 같아서 말씀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길가와 같다고 여긴 사람은
첫째는 안다는 것을 곧 믿는 것으로 착각한 사람이 길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믿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메시야와 그 나라, 천국 아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알았습니다. 특별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즉 성경의 전문가,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이 있고, 할례와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알고 잘 믿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알았지만 막상 성경이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달지 못하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잘 믿는다고 알아서 회개하고 믿으라는 복음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 받고 교회에 나와서, 세례 받고,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직분도 있고, 성경과 신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잘 믿는 신자 좋은 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이 깨달았다는 것, 즉 믿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생각과 감정과 행동, 전인격에 영향을 미쳐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깨달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순천순창지역에서 재선된 국회의원이 선거운동을 할 때 시장에서 산 평상복을 입고 마을회관을 찾아가면 보일러 고치러 왔냐고 한답니다. 거기서 화투치고 놀다가 자기를 알아보면 그때부터 달라진답니다. 국회의원을 만나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깨닫지 못하면 성경을 l일만 독을 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것은 안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 만나는 것이 깨닫는 것이요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니다. 베드로가 나사렛예수를 하나님의 만납니다. 그때 경외심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직시하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게 깨닫는 것, 즉 믿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 변화, 구원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을 좋은 신자로 알기 때문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안다는 자기, 잘 믿는 다는 자기 이게 길가입니다.
둘째로 편협하고 왜곡된 진리지식에 사로잡힌 자기 주관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지 못하게 하는 길가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잘 안다고 했지만, 그들은 성경을 편협하게 알았습니다. 율법을 알았지만 율법을 종교적 계율정도로 알고 이 세상 법률과 같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문 문자만 지키면 율법을 완성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율법, 즉 성막과 제사의식과 제도, 절기를 영구적인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알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율법의 행위에 있게 했습니다. 율법을 편협하게 알고, 왜곡되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문자가 아닌 영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행위와 공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구속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의 껍데기는 계명이지만 알맹이는 언약의 사랑, 은혜입니다. 성막과 제사와 절기가 장차 더 좋은 것의 그림자에 불구했습니다. 메사야 오 천국은 영적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도 보았습니다. 다윗도 알았습니다. 다윗은 제사가 필요 없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세아는 입술로 제사를 대신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구원과 천국의 일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그들의 믿음의 조상들이 깨달은 것을 실체가 왔을 때에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것이 역사이고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전이었습니다. 이 전통과 유전이 그들의 편협하고 왜곡된 진리지식을 주의 주관으로 굳어졌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철학이 되고 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도그마 화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드릴 수 없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이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는 이단으로 여기게 하여 십자가로 보낸 것입니다. 이 완고하고 완악한 주관의 사람이 바로 길 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할 때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이 공회에서 말씀을 전파할 때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를 들어서 설명하고 모세와 선지자를 거역한 것 같이 예수를 죽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다. 행7:54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57절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편협하고 왜곡된 주관주의적 신앙이 그들의 마음을 돌과 같이 완고하고 완악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길가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편협하게 이해하여 성화의 책임과 천국의 상급을 율법적이라고 하고, 공로주의라고 몰아 부칩니다. 구원을 편협하게 알아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구원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자기 주관 때문입니다. 신앙을 세울 때에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신앙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고,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선택 합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기질의 사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좋습니다. 야! 이거다! 이걸 주워들어 골라놓고 이것이 구원의 전부인양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을 전체적으로 배워 나가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전부인 것같이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을 주어 들어다가 자기 나름의 주의, 신조로 만들고 그것을 고착화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고 깨달을 수가 없고 진짜 전인격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이신칭의를 전하면 값싼 복음이라고 하고, 성화를 전하면 율법주의라고 하며, 상급을 전하면 공로주의라고 합니다. 이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 주관주의가 길가입니다.
셋째, 진리와 신앙이 사욕이 된 사람이 길가입니다.
왜 유대인들 특별히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장로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훼방하고 대적하고 십자가로 보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까?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민중들이 선지자로 알고 랍비로 아는 이 혜성과 같이 등장한 나사렛 예수가 자기들의 친구가 되고 자기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율법의 전문가로 대접을 받아 왔는데 예수가 말하면 자기들이 선생이 아니라 진짜 모르고 있다는 것이 폭로가 되었습니다. 눈먼 인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자기들과 놀고 자기들의 장단에 맞추어 주기를 원했습니다.(마11:17-19) 만약 주님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율법과 행위를 전하시고, 세상나라와 그 번영을 전했다면 바리새인들이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그들의 외식을 폭로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분노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를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욕이 예수를 십자가로 보냈습니다. 진리와 신앙을 사욕으로 삼은 것이 길가라는 것입니다. 사욕이 눈과 귀를 가리고 마음을 돌 같이 굳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4:3-4을 봅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게 떡을 먹던 무리가 진리를 선포하니 예수님을 떠난 이유입니다. 이게 가룟 유다가 끝까지 회개치 않고 고집한 이유입니다. 사욕 때문에 자기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고 합니다. 복음의 긍정적인 이야기, 유익한 이야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사욕을 채워줄 많은 스승을 둡니다. 여기서도 조금 하고 저기서도 조금합니다. 이렇게 진리와 신앙을 사욕거리로 삼는 사람은 들었으나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주로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화입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진리와 신앙을 사욕거리로 만들어 천국 문을 막고 백성들을 더욱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을 저주하셨습니다, 눈먼 소경으로 모세의 자리에 그들이 스스로 선생 노릇하고 재판장이 되는 것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진리와 신앙을 사욕거리로 만드는 사람이 다 길가입니다. 안다는 자기, 편협과 왜곡으로 뭉친 주관과 이 사욕이 길가입니다. 이것이 듣지 못하게 하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여 천국이 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와 같은 사람은 전도를 받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보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미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나는 깨달아 믿은 사람에 속하고 그래서 천국이 임하여 나타는 사람입니까? 깨닫지 못하여 아직도 천국의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확정하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마태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는다고 했습니다.(19)마가는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고(막4:15)누가는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눅8:12) 즉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기존한 상태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빼앗겨 더 큰 어둠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십자가로 보낸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본래 메시야와 천국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메시야와 천국이 있고, 성경도 있었습니다. 복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로 오시고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를 메시야로 깨달을 수가 없어서 믿지 못하고, 반대하고 십자가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있는 것, 기존한 메시야. 천국, 하나님과 율법 빼앗겼습니다. 주후 70년에 멸망되고 완전히 이산 되는 저주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에 빠져있는 유대인의 교육방법을 성경적인 교육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참 넌 센스입니다. 이 앙화와 저주는 교회사에서 반복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노시스주의라고 하는 영지주의 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헬라의 이원론 철학에 입각하여 영은 거룩하고 육체는 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은 믿을 수가 있지만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육체가 된다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가현설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인간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 장사된 예수는 실제로 육체가 아니라 가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삼위일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부정한 무서운 이단이 된 것입니다. 이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면 있는 것도 빼앗기고 더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예수를 참되신 하나님과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되신 분이라고 해서 예수를 피조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주의 신학자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이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슈바이쳐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일에 실패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기 위하여 자기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던져 자살하여 지금도 예수의 시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돌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지만 하나님과 성경을 구속과 천국의 일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하게 여기기 때문에 있는 것도 빼앗기고 더 어두운 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길가가 되는 것 같은 저주가 없고, 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길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주시고 오늘도 이 비유로 우리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듣고 깨달은 사람, 참으로 믿는 사람이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ㅡ 믿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쳐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을 암송해도 진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하고 그를 거룩하게 섬겨나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을 때 깨달아서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대로 할 것을 하고, 그칠 것을 그치고, 드릴 것을 드리고 전할 것을 전하게 된 것이 깨닫는 것,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안다는 자기, 주관, 사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인하도록 십자가 앞으로 갑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언제든지 가르침을 받으려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되도록 성령께로 갑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길가와 같은 마음을 기경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 은혜로 길가와 같은 저주와 화에서 자기를 구원합시다. 이 은혜로 들을 수 있는 사람 되고, 듣고 깨달아 그 천국의 열매가 백배가 되고 육십 배가 되고 삼십 배가 되게 하는 천국의 능력이 나타나는 은혜와 축복의 나라에 속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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