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올라가는 길?”

아브라함-la 2017. 4. 2. 18:19

017,4,2 주일강론  

본문 : 막10:32-34

말씀 : 라인권목사

      인생은 올라 가야하고, 올라야 할 존재입니다. 인생의 긍정적인 것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신을 올라가게 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으로 기를 쓰고 올라가려고 합니다만, 막상 올라보니 지금까지 올라온 길이 오르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몰락의 길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에 구속되어 수인번호를 달고 수감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오른 정상은 정상이 아니라 나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동기와 목적이 바르지 못하고, 비민주적인 길을 오르는 길로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문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way up to-이란 말씀은 참 역설적입니다. 물론 본문의 올라가는 길은 지리적 특성과 수도라는 행정적인 의미이지만, 33-34절이 보여주듯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고난과 능욕과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은 모두가 일고 있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길을 앞서 가실 때, 무리는 “놀라고”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way up"이 아니라 "way down” 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내려가게 하는 길을 성경은 역설적으로 “way up"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알면서도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사람은 위해가 되는 것은 피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주님도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마26:39)라는 말씀에서 보듯,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피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과 비장한 각오와 비감으로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본문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앞에 서서 올라가셨다”는 말씀은 이런 비장하고 비감한 마음으로 올라가셨다는 이미지보다, 오히려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는 양 몸이 달아서 가셨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십자가라는 고난과 능욕과 죽음이 기다리는 길을 무엇이 좋다고 못가서 안달이신 것 같이 올라가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그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에게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살고 살리고 승리하고 영광에 이르는 “way up"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34절이 분명히 증거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이 살고 살리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흔연히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주님께는 십자가의 길이 오히려 삶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며 영광과 행복의 길이기 때문에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14:26)는 말씀에서 보듯,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고난의 종소리를 울리며 가시기보다는 기쁨의 종을 울리며 가셨습니다. 이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게 하시셨습니다.(빌2:6-11)



그러므로 믿음은 십자가의 길을 "way down,"로 아는 것이 아니라 “way up"으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죽는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는 길, 사는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 생명의 길로 알고 기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way up이 아니라 way down으로 알고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부도 그렇지요, 공부하는 것은 지루하게 하고, 힘들고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공부하려면 먼저 놀고 싶은 자기. 재미있고 싶은 자기, 편하고 싶은 자기를 죽여야 공부가 됩니다. 이 대가를 지불할 수 있고 없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공부가 자기를 진짜 자유하게 하고, 편하게 하고 재미있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길임을 절실하게 아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형설지공螢雪之功”을 고생이 아니라 낙으로 알고 공부할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죽는 것이 공부입니다. 이 공부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공부 잘하면 여러분 공부가 괄목상대가 되는 겁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을 way down이 아니라 way up으로 아는 것이 우리 삶과 인생을 진정으로 올라가게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의의 길로 우편 보좌에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사람들이 줄줄이 서울구치소로 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분들 한 마디로 불법과 불의와 부정의 길을 "way up"으로 알아 서지요. 그 결과 이분들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최아무게 딸이 “돈도 실력이야 네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했다지요? 저는 참 이분들 못살아도 너무 못살았다는 느낌입니다. 이 분들 참 밑바닥이지요, 나락인생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불의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과 같이 믿음의 길, 의로 사는 길을 way up으로 아는 것입니다. 시편1:1은 이 가치관을 예찬한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한 줄로 믿습니다. 불의, 부도덕, 죄는 올라가는 것 같지만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way down"인 것을 알고 죽기로 죄에서 떠나서 예수님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을 올라가는 길이라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칭의는 자기와 자기의가 죽은 사람에게만  임하는 은총입니다. 자기라는 옛 자기가 죽는 것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고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구하는 대로 받는 겁니다. 내가 죽어야 기도가 되고, 성경 읽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순종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병은 십자가의 길을 삶을 얻는 길로 확신하지 못해서 못 죽고, 안 죽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가 죽는 길이 사는 길이요, 승리하는 길이요, 하늘의 영광에 이르는 길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주님과 같이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과 부활로 올라가는 길로 확신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을 흔연히 걷어서 주님의 영광에 오르는 참 제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길로 당신의 자녀들이 삶을 얻고, 생명과 영광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는 길로 확신하는 제자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요구되는 대가를 기쁨으로 지불할 수 있게 하여 자기 일에 일가를 이루는 올라가는 인생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는 길로 아는 성도를 이 세상길이라는 죄와 유혹대하여는 죽고 힘써 믿음의 길로 진정으로 정상에 오르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을 사는 길로 확신하는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구원에 성공하고, 무엇이나 구하는 대로 받게 되고,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올리실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자식들과 달리 십자가의 길로 생명과 영광에 오르는 백성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주일을 앞둔 오늘 주님의 요구하심은 십자가의 길을 고난과 능욕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살게 하고, 살리는 생명에 올리는 길이요, 승리와 영광에 올리는 길로 확신하고 주님 같이 흔연히 기쁨의 종을 울리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이 진리를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죽음으로 살고 살리고 영광에 이르는 하늘의 사람들입니다. 이 하늘의 사람들에게만 죽는 것은 참으로 살고 하늘의 영광이 오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고난주간을 앞둔 우리 주님의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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