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4,16,부활절
본문 : 시16:8-11
말씀 : 라인권목사
복된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평강이 우리 모임과 근거 없는 전쟁의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이 민족위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날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파는 것과 신앙도 헛되고 예수의 십자가도 헛것이 된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을 믿지만 우리는 부활을 미래에 속한 일로만 여기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르다가 그랬지요. 예수님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겠다고 하시자. 마르다는 “부활의 날에 다시 살줄 아나이다”(요11:24)고 했습니다. 마르다에게 부활은 먼 장래의 일에 불과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부활이 재림 때의 일에 국한 되어 있기 때문에 부활신앙은 끽해야 슬픔을 당하면 재림 날에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살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자는 정도입니다. 그러면 성경도 부활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부활과 부활신앙의 의미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상고하되 부활신앙이 분명치 않다고 여기는 구약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면에서 큰 빛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부활 천 년 전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보고 그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게 다윗 자기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일을 말하는 것이지 구분이 쉽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력에 굴복당하시지 않고 자기처럼 사실 것을 보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카일과 델리취의 해석도 저와 같이 “다윗이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직면한 죽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온 자신의 삶에서 부활의 주를 보고 자신의 이야기로 예수의 부활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다윗이 믿은 그 부활신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신앙이었냐는 겁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부활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8)라고 하셨지요. 왜 다윗은 하나님을 항상 모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에 그 분은 전능하십니다. 이렇게 언제나 생존하시기 때문에 항상 내 앞에 모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생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은 죽음을 겁내고 죽음 앞에 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낯선 타동을 지날 때에 저 혼자 가면 무섭지만, 아버지와 함께 가면 조금도 무섭지 않았지요? 그래서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에 원수들로 인해서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울 때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두려워하고 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부활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동일한 신앙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었다는 뜻입니다.(롬5:17) 하나님이 살릴 것을 믿고 이삭을 바쳤지요.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이 믿음이 부활신앙이요. 실제로 부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히11:1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생존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부활신앙이요. 신앙과 부활은 살 것을 믿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 부활 신앙은 그의 현재적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9-10절입니다. 자기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니다” 이 말을 쉽게 바꾸면 사울 당신이 제 아무리 나를 죽여 무덤에 던져 썩어 없어지게 하려고 해도 내가 모신 하나님 때문에 사울 당신이 나를 결코 썩어 없어지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물론 내 육체까지도 터럭하나도 손댈수 없이 안전하다는 겁니다.
이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두 가지를 하게 했습니다. 하나는 사신 하나님께 자신의 영과 육신을 안전하게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닥친 죽음과 당당히 맞서 나가서 싸우고 거기서 살고 살아나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을 자로 알고 죽을 사람처럼 전전긍긍 산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 자로 알고 살 사람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부활신앙은 부활로 현재의 삶을 살아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은 장래의 일만 아니라 지금 현재 직면한 삶과 삶의 문제를 살고 살리는 삶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메시지는 “내가 산 것 같이 너희도 살겠음이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현재를 죽어가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의미이자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과 죽음의 자리가 부활의 예수를 보고 만나는 부활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이 이를 증거 합니다. 10절은 행2:29-32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 같이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썩지 않고 부활 할 것을 보았을까요? 다윗이 부활을 알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성령의 영감으로 황홀한 상태로 보았을까요? 영감은 이렇게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는 유기성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종이라는 신분과 소명의 유기성입니다. 둘째는 다윗과 다윗의 왕권이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왕권과 왕국과 동일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 다윗이 이 신분으로 사울의 박해로 죽음에 직면 했습니다. 이 박해의 자리, 이 박해로 인한 고난과 고통의 자리, 이 죽음의 자리에서 다윗은 자기와 같이 예수께서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 나오실 것을 보고 만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기를 하나님이 살아나오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환난과 핍박, 궁핍과 닥쳐오는 죽음의 위기는 부활하실 예수를 만나는 부활이 현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를 살리신 자기 이야기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처럼 썩어 멸망하지 않고 살리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렇게 썩음 당치 않으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를 보는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원수가 자기의 마음과 영은 물론 육체마저도 결코 죽게 할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싸워 불사조와 같이 살아나오게 했습니다. 저도 큰 환난에 처했을 때 거기서 이 믿음 이 방법으로 살 자로 살아서 죽지 않고 살아나고 살아왔습니다. 거기서 부활의 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면 “부활 하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를 목이 쉬도록 부릅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다윗같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완성될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 자로 살고 있습니다. 이게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의 삶의 자리의 문제와 위기는 부활의 주를 보고 만나는 부활의 자리요 부활의 현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재적으로 부활을 경험입니다. 이 부활로 우리의 삶의 문제의 현장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부활이 현장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부활을 생명의 길로 이해했습니다. 생명 길은 사는 길, 살리는 길, 생명을 얻는 길, 참된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뜻합니다.(마7:14) 그리스도의 부활로 되는 이 생명 길을 보이시고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다윗은 이 믿음, 이 부활의 소망, 이 능력, 이 길로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삶을 얻고 이루어 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나갔습니다. 이 길은 삶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길에만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길입니다. 본래 죽어가는 멸망 길에 있는 우리에게 이 생명 길을 열어주시려고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 당하시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오셔서 이 생명 길을 우리 앞에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조상 다윗이 닦다가 우리 예수님이 부활으로 이룬 생명길이 우리 앞에 열렸습니다. 우리 앞에 이 삶을 얻는 생명길이 열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길로 조상 다윗처럼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얻어 나갑시다. 이 길로 부활하신 우리 주님같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루고 부활의 영광에까지 살아가시는 부활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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