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4,9,종려주일
본문 : 시22:1-21
말씀 : 라인권목사
우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알기를 원하고 사모하고, 체험하기를 원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각종 성령의 은사도 좋고,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황홀한 신비를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가장 놀라운 체험은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것이 가장 놀라운 체험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이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들이 가장 사모하는 은혜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를 더 깊이 아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찬송가 “웬 말인가 날 위하여”를 애창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정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고백하게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 십자가의 예수
이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봉독한 이 시편22편과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을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이 시편22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역사적 사실로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했습니다.(마27:35) 그러나 시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영적인 고통(1) 정신적인 고통(6) 육체적인 고통(14,15)을 구분해서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이 시22편은 사53장과 더불어 “골고다의 노래”라고 할 만큼 고난의 종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이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이 말씀이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 성취되어졌습니다. 따라서 루터가 “아기를 보려면 요람으로 가야 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성경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이 시22편이야 말로 십자가의 예수와 십자가의 은혜를 생생하고도, 깊이 만나게 하는 성경중의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의 사람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가장 깊고 생생하게 만난 사람
따라서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이 오시기전 약 천 년 전의 사람이면서도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십자가의 예수를 생생하게 만났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그는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제사가 필요없다는 혁명적인 말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시51:16)이게 우리가 특별히 다윗을 주목해 볼 이유입니다. 그는 구약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이지만, 모든 선지자들이 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언했지만 다윗과 같이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이 차이는 영감이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에게는 다른 선지자들보다 십자가의 예수를 더 생생하게 공감하고,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다윗만의 경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윗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생생하게 만나도록 하나님께 사용하신 다윗의 경험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의 십자가로 만난 십자가의 예수
그게 바로 다윗의 십자가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22편의 고난은 예수님의 것이기 전에 먼저 다윗의 고난입니다. 시22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난은 사울의 박해로 인한 고난입니다. 다윗이 사울이 사유화한 이스라엘을 사울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에 순종하고 헌신할 때 사울과 사울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받는 오해와 미움과 박해는 다윗이 지불해야할 대가와 같은 것입니다. 이 고난의 대가가 다윗이 지고 갈 십자가요, 철없고 무지한 백성들의 오해와 부화뇌동이 다윗이 져야할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난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대리적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다윗의 십자가였습니다. 여기서 받는 오해, 중상모략, 미움과 박해의 아픔이 다윗 자기처럼 오해받고 버림받아야 할 예수를 더욱 바라보게 하고, 다윗 자기처럼 미움과 억울한 고난을 받는 예수의 고난을 깊이 공감하게 하고,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십자가를 순종하는 십자가의 경험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생생하게 만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의 고통으로 십자가 앞에서고 이해는 할 수 있는 존재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은 다윗과 같이 자기가 져야할 제 몫의 십자가가 있는 존재이며, 인생은 그 아픔을 통해서 진정으로 십자가 앞에 설수 있고,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만나고 이해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긴 세월 동안 사울의 억울한 박해의 고통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예수와 예수의 고난을 시22편과 같이 깊이 공공감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다윗이 당한 배신의 뼈저린 아픔이 십자가에 뼈가 어그러지는 예수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만 예수 앞에서 서고 십자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교만과 경험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교만하여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자기가 아파야만 비로소 남의 아픔을 이해 할 수 있고, 이것이 인생을 겸허하게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눈 깜박이 시인 “미즈노 겐조”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다가 설수 없는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보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자기 십자가는 십자가가의 예수를 깊이 이해하게 하고 생생하게 만나게 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 십자가의 아픔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라고 믿습니다. 자기 십자가의 고통이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고난의 비밀을 아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면에 자기 십자가의 고통은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이해하고 생생이 만나게 하는 은혜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자기 십자가에 대한 고뇌와 기도가
그러나 다윗이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알고 생생하게 만나게 한 것은 단순히 자기 십자가를 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지는 십자가에 대한 깊은 고뇌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22편은 다윗의 고뇌, 다윗의 낙심, 다윗의 자의식과 상처, 다윗의 아픔을 생생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절망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사울에게 박해를 당했다는 겁니다. 이때 다윗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할까”고민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실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기도를 마치 외인과 같이 외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절망의 문턱에서 하소연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내 종 다윗아 네가 나의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중보자로 박해를 받는 것이 그렇게 억울하고 아프냐? 그러면 내가 네게 택한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을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을 보여주랴? 하시고 십자가의 고난당하시는 예수를 보여 주셨다고 믿습니다. 기계적이 아닙니다. 내 십자가를 고민하고 깊이 사유하고 기도 할 때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생생하게 만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고. 외로울 때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시22편과 같은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게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 고민하고 아픔과 기도를 통해서 당신을 깊이 알게 하시고 생생하게 이해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자기 십자가를 이기는 능력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순종하는 고난으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의 십자가의 예수를 생생하게 만난 것이 다윗의 가는 십자가의 길에 어떤 능력이 되었겠습니까? 시편은 다윗은 자신이 지는 십자가의 고난이 예수의 고난이요. 예수의 고난이 자기의 고난이라고 자신과 그리스도를 일체화 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시편의 저주의 시편들입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죄 없이 저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다, 이 긍지, 이 자기 인식이 의연하게 박해를 받게 했습니다. 이 인식이 자기 십자가의 순종과 고난의 량을 다 채우게 한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승리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므로 자기 십자가의 고난을 극복하고 소망 중에 자기 십자가의 순종과 고난의 량을 채워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6-21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보고 예언합니다. 그리고22-31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보며 자신의 구원과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십자가의 예수를 보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순종하는 힘이요, 자기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능력이 되고, 자기 십자가 앞에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십자가의 예수를 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기 십자가를 승리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십자가 위에서 이 시22편을 암송하시고 이 시편으로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이 십자가의 예수를 보며 자기 십자가를 감당한 것같이 주님께서 다윗의 십자가를 보시며, 다윗의 방법으로 십자가를 견디시고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수난자의 위로요, 소망이며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생이 바라보는 것이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것이 원수를 갚는 것입니까? 다윗은 원수 다윗을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고 선대했습니다. 그 후로 원수의 부당한 대우를 참고,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원수의 박해가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만나게 합니다. 그 원수에게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가 보이고, 예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고 원수를 선으로 이기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면에서 내 십자가인 자식이나. 배우자나, 부모가 골고다의 십자자가의 자리요,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 그 사람에게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며 생생하게 만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알아가고 체험하며 닮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다윗에게는 왕이 되는 것이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각각 하나님께서 내 몫이 되게 한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와 이 십자가를 순종하는 고난이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알게 하고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해가고, 그 죽으심과 부활의 비밀을 알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다윗과 같이 순종합시다. 자기 십자가를 깊이 고뇌하고 기도하시므로 골고다의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십자가의 예수를 생생하게 경험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는 다윗처럼 자기 십자가를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고난 주간에 다시 골고다로 갑시다.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이것이 지금은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우편보좌에 계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소원하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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