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상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려고 본심이 아닌 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경우가 있지요, 재난과 친구들의 무자비한 충고로 마음이 상한 욥이 자기가 이제부터 하나님께 하려는 말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이제 까지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낼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선악에 무심하신 것이 아니냐는 변론을 제기합니다.(10:1-2)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가지신양 재판장이 오판을 하듯 선악을 착각하신다고 합니다.(4) 이렇게 악인이 빛을 보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에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니냐고 하나님께 어거지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하게 살아도 일생이 너무 짧아 덧없기만 한 인생을 일부로 죄를 찾아내서(5,6) 벌을 주시는 것은 마치 만들었다가 부수는 놀이와 같이, 벌주시는 것을 즐기시기 위하여 인생을 창조하셨다며, 자기를 지으시고 이제까지 보살펴주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게 악의를 가지셔서 재앙을 주시고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군대같이 자기를 치기 위함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욥은 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냐며, 이제 제발 죽기 직전인 자기를 버려두셔서 잠시나마 평안한 중에서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어둠뿐인 스올에 가는 것이 억울한 재난을 당하고 악질에 신고하는 몸으로 사는 것보다 낫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욥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여전히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에 없는 소리로 하나님께서 선악에 무관심 하시다고 어거지 소리를 하는 것은 고난으로 상한 심령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고난으로 상한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마저 악의로 느껴지게 하고, 생명을 죽음만 못하게 여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성도 욥의 한계입니다. 우리 신약성도는 죽음 후에 생명에 대한 부활의 소망이 분명합니다. 이 부활신앙이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하여 죽음을 이는 삶의 능력이 되게 합니다.(롬6:8,9)우리 신약성도는 욥의 경건으로도 누리지 못한 이 복을 누림을 찬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 즉 삶을 은총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이든 삶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삶을 존엄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고난으로 상한 심령이 어떠한지를 역역하게 보았습니다. 삶보다 죽음이 낮다는 마음을 가진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생질로 상대적 우월감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기독교적이며, 비인간적인지를 이 새벽 가슴에 새깁시다.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이렇게 고난으로 약해지고 상한 심령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빛을 보게 도울 수 있다면 이 또한 축복이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일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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