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닷은 욥에 대한 두 번째 변론자입니다. 이 수아 사람 빌닷이 구사하는 어투로 보아 그는 엘리바스 보다는 직설적인 사람입니다. 빌닷은 욥이 자기 의를 주장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 부당한 것이라고 하나님께 항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는 자를 자처하고 나섭니다.
그는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서 먼저 욥에게 그가 당하는 고통을 분석해 주는 작업을 합니다. 그는 욥의 십남매가 한 자리에서 죽은 것은 네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죄었거나, 욥 너의 죄 때문에 벌 받아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욥 네가 하나님께 돌아와-회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네 집에 평안을 주시고,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다.” 고, 기도라는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하여 친절하게(?)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공의와 악인의 운명을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왕골과 갈대가 물이 없는 데서 자랄 수 없고, 바위 위에 난 풀이 햇볕에 쉬이 마름 같이 망한다. 하나님은 결코 순전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시지 않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욥 네가 당한 재앙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닷의 이 분석과 처방은 인과응보라는 구태의연한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8:8-10) 인과응보의 법칙은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며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의 인과응보, 즉 공의라는 전통적인 신학에 매몰된 섣부른 신학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마른 땅에 이슬 같은 말씀으로 사람을 소생케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잡는 사람이 되게 했고, 기도가 만병통치인양 섣부르게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섣부른 신학이 섣부른 처방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섣부른 신학과 섣부른 처방이 “쓸데없는 의원” 즉 사람 잡는 돌팔이 의사를 만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는 전통적인 신학이 마치 하나님의 전부를 다 안 것 같이 자기를 정통한 자로 여기고 있다면, 그는 성경도 하나님도 오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신학적 독단과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자비라는 인간성을 상실한 차가운 돌과 같은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한 다는 것을 빌닷은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기도해! 기도하면 돼!” 고난의 한가운데 있어서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렇게 값싸게 기도를 처방하고 있다면, 당신도 빌닷 류의 신자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기도를 처방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헛 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
고난의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와 도움이 없는 기도의 처방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며, 남의 고난을 충고라는 방법으로 즐기는 비기독교적인 것이요, 설익고, 섣부른 신학으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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