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에 대한 둘째 공격자인 빌닷의 훈계에서 욥은 드디어 중보자의 중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왜 욥은 중보자의 중재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습니까?
첫째,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엇갈리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재앙은 반드시 죄의 결과라는 친구들의 신학적 주장 앞에 자신은 이런 재앙을 받을 만한 죄가 없다는 욥의 자기변호는 오히려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를 교만하고 완악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억울하고 답답함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중재할 중보자를 절감하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욥은 결국 자신에게 죄가 있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는 눈 녹은 물로 씻고 잿물로 씻을 지라도 깨끗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30) 여기에 욥의 모순이 있습니다. 욥은 빌닷과의 변론에서도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15,21) 사람 앞에 의롭지만 하나님 앞에 죄가 있는 이 치열한 모순이 중보자의 중재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로 변론 하는데 해결이 있다고 확신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주재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지혜를 상대로 변론해서 이길 가능성도 없고, 그분이 부당하게 대우하셔도 항변 할 수 없고, 그 분을 법정으로 소환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재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중보자)도 없구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과 그 막막함은 이렇게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고, 이를 갈망하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애소가 마침내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중보자 그리스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보자의 필요성, 십자가의 피의 구속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중보자를 절감하고 욥과 같은 애소와 애통을 울린 사람은 진정으로 완전한 속죄를 받은 사람이요.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입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뜻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욥은 이 가난과 애통에 이르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욥이 고난을 당할 이유이지만, 그래도 욥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로 중보자를 애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 의에 붙잡혀 있어도 하나님 앞에 서려고 욥과 같이 치열하게 하나님께 말하여 하나님께 육박해 들어가는 이는 구원이시자, 전부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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