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새벽 정신으로 읽는 욥기 강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신학

아브라함-la 2018. 10. 1. 17:33

소발은 욥에 대한 세 번째 공격자로 등장합니다. 소발은 먼저 욥이 하나님 앞에 말이 많은 것이 경건치 못한 일이라고 꾸짖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말을 적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소발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깨끗하다는 주장을 망령되다고 꾸짖습니다

 

이러한 욥의 주장은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옳고 지혜롭게 여기는 처사가 되기 때문에 소발은 하나님을 편들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오묘한 지혜와 지식의 광대하심을 나타내 주셔서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는 욥의 어리석음과 자만을 깨뜨려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찬란하게 설파합니다.(5-11) 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비추어 욥이 받은 재난은 오히려 욥의 죄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하나님을 편들었습니다.(6)

 

그래서 소발은 욥에게 네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네 손에 있는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고난 중에서 욥이 바라는 축복을 주실 것이요, 고집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멸망이라는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엄한 경고로 말을 맺습니다. 이런 소발의 주장은 앞의 친구들의 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욥의 고난에 대한 해답도 되지 못하며, 도리어 욥을 괴롭게 하는 것이 되어버려서 말하자면 좋은 상담자, 목회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왜 소발과 그 두 동료들은 오히려 이렇게 쓸데없는 의원이 되고 말았을까요? 첫째는 지식적인 신앙과 신학과 마음의 신앙이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소발이 편든 하나님의 지혜, 지식성에 대한 지식은 찬란합니다. 그러나 이 소발이 욥을 악인으로 단정한 것은 이 지식에 모순됩니다. 소발이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지혜를 믿었다면 고난이 악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국 소발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지는 지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논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자기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끝장인 것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발과 그의 동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데서 오는 폐단입니다. 소발과 욥의 친구들은 자기 자신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한 인간으로 욥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한 인간 욥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인애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마치 회당의 손 마른 자를 보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기를 기다려 책잡으려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비인간적인 목자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서령 한 사람의 신학이 지적으로 완벽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신학은 결코 생명의 신학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학을 사람을 살리는데 쓸 수가 없고 검사와 같이 심판하는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먼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지 못한 이의 신학은 강도의 손에 최신형 자동발사 기관총을 들려준 것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이 가공함을 깨는 것이 죄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새벽 이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기도합시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시기를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는 비록 신학적 소양이 조금 모자라도 사람을 고치고 세우는 목회적인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