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욥기는 2라운드에 돌입했습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욥에 대한 취조와 심문은 “인과응보”라는 진부한 주장을 말만 바꾸어 다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인과응보”라는 흘러간 유행가를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했다는 것이지요.
엘리바스는 먼저 욥의 말하는 태도가 욥의 가증한 죄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오금을 박는 것으로 포문을 엽니다. 욥의 말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보다 먼저 있은 지혜의 지존인냥하고,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양, 독단적이고 교만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15:4-8)
그리고 나이든 사람의 충고를 겸허히 감사함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감히 하나님을 옳으니 그르니 하며, 하나님 앞에 눈에 힘을 주고, 입을 놀리는 것이 참람하다고 질타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상식적인 신학을 토대로 네게 악이 있기 때문에 그 악 만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섬뜩하게 논하고 그 악인의 운명은 재앙과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엄한 경고로 말을 마칩니다.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이 정죄는 하나도 욥에게 해당사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무지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한 것 같이 말한 다고 비난했으나, 정작 자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한 정말 사색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인과응보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통을 주시고, 그 고통에는 더 좋은 은혜를 예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그러므로 고통 후에 예비 된 상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재앙은 반드시 악이 있기 때문이고, 그 악의 분량이 고통의 분량이라고 단정해서 욥에게 쓸모없는 의원이 되어 비참한 욥을 더욱 비참하고 참담하게 만든 것입니다.
왜 욥의 친구들이 이런 끔찍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우선,하나님을 편드는 그 자체가 좋은 신앙이요. 훌륭한 신자요, 그것을 자기의 의로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월의식에 도취되어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하는 무지한 사람이 되게 했고, 이런 의식이 모세의 자리에 앉게 하여, 성경과 신학을 사람을 때려잡는 무기 이 외의 용도 밖에는 없는 것으로 만드는 바리세인 류의 인간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이요, 비신학적이고, 비기독교적이 된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욥의 고난을 동정하고 위로하고 함께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려고만 하는데 있었습니다. 욥과 욥의 고난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 고난당하는 욥은 신학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 탐구의 즐거움을 만끽시켜주는 대상이 되어서, 마치 실습용 개구리나, 해부학 교실의 실습용 시체 해부하듯 하게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의 시금석입니다. 재난으로 바닥에 떨어져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에 긍휼히 여기고,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하려는 마음이 동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무엇을 잘못해서 저렇게 되었지? 이렇게 의심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분석하여 선생이 되고 싶어 한다면 그는 머리의 신앙을 마음의 신앙과 신학으로 착각하는 주님의 마음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학은 그것이 심지어 복음일지라도 사람을 잡는 망나니의 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무서운 신학을 고장 난 엘피판 돌리듯 하면 얼마나 사람을 잡고, 충분히 비참한 사람에게 비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아! 이 아침! 이 비 기독적이며, 비인간적인 비정한 정신이 내안에 있음을 끔찍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끔찍하게 여기는 마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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