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에셀 나무를 심은 감사

아브라함-la 2018. 11. 11. 21:27

018,11,11, 추수절  

본문 : 창21:22-34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 본문에 에셀 나무가 등장합니다. 에셀나무는 상록수입니다. 이 나무는 뿌리가 30미터나 깊게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메마르고 거친 광야에서도 마치 시냇가의 나무마냥 번성합니다. 이 에셀 나무아래서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의 막료들과 작전회의를 했다는 말씀에서 보듯 이 에셀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라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삼상22:6) 그리고 이 나무는 잎에 염분이 발생하므로 여타의 나무들보다 이슬이 많이 맺어서 이 수분의 증발로 나무아래는 더 시원해진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유일한 기념식수

오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 동안 자기를 괴롭히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제 발로 찾아와서 친구로 살자고 동맹을 맺은 후에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이름하고, 거기에 이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단을 쌓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여호와께서 당신을 자기에게 나타내 주신 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단은 쌓은 곳은 여러 곳이지만, 단을 쌓은 곳에 나무를 심은 것은 오직 이곳뿐이요. 성경전체에서도 여기가 유일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광야에서도 잘 자라는 에셀 나무를 골라서 기념식수를 했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기념하려고

벽오동 심은 뜻이라는 시조가 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무슨 뜻으로 에셀 나무를 심었을까요? 이 아브라함의 의중을 알게 해 주는 말씀이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부르지 않은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영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들어가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다.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적인 하나님”, 더 쉽게 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자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1:8,22:13)이 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삶의 현재적 정황에서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현재적인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이 구원이 되셨을 때에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고 이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현재적인 하나님으로 블레셋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돌아 간 후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아브라함이 적대적인 블레셋 사람들의 영역에 들어가 사는 동안 현재적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현재적 삶의 문제에 임하셔서 구원이 되어 주시므로 일어난 은혜로운 일들이 있게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그것을 영구히 기념하고자 천년도 사는 에셀 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드리지 못한 은혜와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이 에셀 나무를 심는 감사! 에셀 나무를 심고 드린 감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약하고 부족해도 불신세계에서 승리케 하신 은혜를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은 감사는 자기의 온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불신세계에서 지켜주시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감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초장을 찾아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도 모르는 이 사납고 호전적인 사람들에 죽임 당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이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하고,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두려워서 걱정하면서도 블레셋 땅을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약함 때문에 아내를 빼앗겼습니다만.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이 범하지 못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편들어 아비멜렉을 책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선지자다. 내 종이다. 이렇게 아비멜렉 앞에서 아브라함을 높여주셨지요. 그리고 이 부족한 아브라함과 현재적으로 함께 하셔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잘되는 것을 보고 아비멜렉이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친구가 되자고 찾아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게 무엇 때문입니까? 아브라함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 사람에게 질타를 받는 아브라함과 현재적으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서 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배하고 찬미하고 감사하려고 에셀 나무를 심어서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부족해도 이렇게 늘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켜 주셔서 언약 안에서 번성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악한 삶의 조건인 광야에서도 번성하고 늘 푸른 에셀 나무를 심어서 이를 영원히 기념하려고 한 줄로 믿습니다. 이게 에셀 나무를 심고 드린 감사요, 에셀 나무를 심는 감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 같고 블레셋 땅 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건재하고, 세상이 우리를 막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잘하고 온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언약을 이루시려고 현재적으로 함께 해주시는 결과인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로 몸도 맘도 연약하지만 새 힘을 주셔서금년 추수감사라는 에셀 나무를 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지키셔서 마침내 세상이 굴복하는 날이 오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가 금년 추수절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약하고 천해진 우리를 탓하시지 않으시고 현재적으로 함께 하셔서, 이 세상이 넘보지 못하게 하시고 손대지 못하게 하시고 해하지 못하게 해주신 이 은혜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의 에셀 나무를 향기롭게 심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임을

둘째,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드린 감사는 적대적인 불신세계를 믿음의 방법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이라는 말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이 세상나라의 영이요, 방식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초장을 찾아 비옥한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들어갈 때 내가 이런 세계, 이런 사람들을 감당하고, 승리 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와 걱정과 두려운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이라는 천국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방법으로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블레셋 사람을 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런 족속에게는 믿는 마음으로 좋게만 하면 나를 호구로 알거야! 저들이 되로 주면 말로 주어야지!” 이렇게 독한 마음을 먹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과 꼭 같이 하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인생을 그렇게 살면 하나님의 백성이나 이 세상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간증이 안 되고, 덕이 안 됩니다. 증거가 안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방법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했습니다. 원수를 맺고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천국의 방식으로 양보하고 져주고 용서하고, 화평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과 같이 악하게 살지 않아도 이겼습니다. 천국방식으로 살아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함께 하여 구원이 되시므로 아비멜렉이 먼저 꼬리 내리고 친구 되자고 나왔습니다. 진 것이 아니라 이긴 것입니다.

 

인생을 세상 사람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임을

여기서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영으로 살지 않고 천국방식으로 살아도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 세상 사람과 같이 야박하고 더럽고, 악하게 살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승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아브라함이 이것을 감사하려고 에셀 나무를 심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도 이 적대적인 불신 세계에서 에셀 나무와 같이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을 후손에게 전하려고, 가르치려고 에셀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이것이 벽오동 심은 뜻에셀 나무를 심는 감사입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혹시 이 믿음으로 사는 착한 남편을 병신” “그렇게 착해 터져서라고 질타하신 적 없으십니까? 자식에게 너 맞고 들어오면 병신이다. 때려라이러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이 블레셋 땅 같은 세상에서 인생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악하고 더럽게 살지 않고, 천국으로 살아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하나님 없는 사람들과 같이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 너 죽고 나 살자! 이렇게 각박하고, 원수 맺고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행복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감사치 못했습니다. 인생을 하나님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이기는 사람임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의 에셀 나무를 심기 바랍니다. 이 감사가 우리 자식에게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이렇게 가르쳐서 인생을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아도 승리하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리게 하는 이 벽오동을! 이 에셀 나무를 심는 추수감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약속을 주장해 나갈 수 있음을

셋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드리는 감사는 이 적대적인 세상나라에서도 얼마든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의 나라를 주장해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땅에 들어간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차지한 땅도 언약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이 땅도 하나님께서 나와 내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다. 이렇게 주장하기가 겁이 났을 겁니다.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런 아브라함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블레셋 땅에 단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하면서도 믿음으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믿음으로 살 때에 영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블레셋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서 만인 환시리에 공개적으로 마음 놓고 제단을 쌓고 에셀 나무를 심고 마음껏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과 같아도, 이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약속의 나라를 주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걸 감사하려고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양을 이리 중에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돈도 권력도 없는 사도들을 공중 권세를 잡은 땅 끝까지 증인 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믿음하나로 대적하는 세상에서 편만하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저도 이렇게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믿음 하나로 이 지역사회에서 교회를 세워나가고 천국을 세워갈 수 있음을 감사하는 에셀 나무를 심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 하나로 사명 감당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고 해 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예배자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감사하는 에셀 나무를 심는 추수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음을  

넷째,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드린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블레셋 땅 같은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블레셋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장정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가장 오래 산 곳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땅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거기서 아무것도 못 이루고, 쫓겨나지나 않을까? 이렇게 걱정했을 것입니다. 천국적인 방법으로 불신세계에서 경쟁이 될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내를 잃을 뻔도 하고, 우물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그 땅에서 사업인 목축도 해내고, 자식도 길러내고 다 하고 거기서 오래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성공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장로님 저렇게 착하기만 해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순함과 착함이 통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적응력이 없다. 세상과 믿음은 충돌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면 경쟁에서 진다.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상의 나라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말하자면 요령이 없는 꽉 막힌 원칙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라는 이질적인 우상의 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그 이질적인 우상의 나라, 적대적인 세계에서 얼마든지 살았습니다. 다 해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오히려 왕께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증명해낸 것입니다. 이런 은혜!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금년 추수절에 이 에셀 나무의 감사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를 에셀 나무를 심어 감사하시기를 축복입니다.

 

이 에셀 나무는 살아있는 승리의 기념비입니다. 우리 기독자가 이 살아있는 승리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현재적인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하고, 세상은 악해도 우리에게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인 믿음이라는 자산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이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을 이 세상 사람과 같이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도 이기게 하셨습니다. 약속을 주장하게 하셨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할 수 있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게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고 부족해도 에셀 나무를 심는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은혜로 가족여러분! 지금까지 이 은헤, 이 행복, 이 권능를 알고 이 감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에셀 나무를 심는 감사를 드리면 그곳이 축복의 최대치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은 블레셋 사람의 영역이었던 브엘세바가 후일 아브라함의 자손의 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는 언약의 전 판도, 즉 축복의 최대치를 일컫는 상징적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에셀 나무의 감사가 블레셋 땅이 축복의 전 판도, 축복의 최대치를 상징하는 땅이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가 이 에셀 나무를 심는 비전이 넘치고 향기로운 감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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