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강론

구유에 뉘신 구세주

아브라함-la 2018. 12. 25. 22:13

018, 성탄강론  

본문 : 2:1-14 

말씀 : 라인권목사

복된 성탄절에 아기 예수의 은총이 온 누리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구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우리 성경에 구주라고 번역했는데 영어로는 SAVIOR입니다. 영어사전은 구세주, 구원자, 구제자라고 했고 한글사전은 괴로움이나 곤경에서 구해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savior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구세주가 더 정확한 번역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예수를 모든 문제의 구원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성탄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신거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 구세주께서 나신 내력을 소개하는 말씀인데 우리의 허를 찌르는 게 구유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구유라는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7절은 마리아가 구세주이신 예수를 출산해서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귀하신 구주가 외양간에서 출산하여, 침대나 요람이 아닌 가축의 먹이 통인 구유에 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은 천사가 이 소식을 목자들에 전할 때에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세주로 나신 아기를 알아볼 수 있는 상징, 심볼이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6절은 목자들이 가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찾아서 경배했다고 합니다. 구세주가 아기로 출생하고, 구유에 계십니다.

 

이건 유대인들의 허를 찌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은 어느 날 홀연히 백마를 탄 초인 영화롭게 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구유로 오신 겁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구주를 영접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완전히 당한 것이지요. 이게 지금도 구주를 모시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 구유는 구세주 예수를 모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구세주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이 무엇이지요?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을 피부에 닿게 표현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데 구유는 이 믿음을 우리 가슴에 닿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유와 같다는 겁니다.

 

첫째, 믿음은 천한 구유로 오는 것과 같습니다. 구주를 보기 위하여 구유로 오는 것이 인간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는 것은 별을 보고 구세주가 나실 것을 알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잘 입증했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도 주님이 나신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건 왕도, 왕궁으로 갔다는 거지요, 이게 상식입니다. 구세주시라면 당연히 높고 고귀한 자리, 궁궐에 계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높고 귀한 자리에 구세주는 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는 오히려 낮고 천하기 그지없는 가축의 먹이통인 구유에 계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구세주는 존귀하시고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 귀하고 지고하며 고상한 데- 의로운 행실, 고귀한 구제와 봉사, 거룩한 고행과 구도, 높은 지식과 지혜, 철학이나 종교- 에 구세주가 있고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세주를 만나려고 하고, 선행과 구제로 구도나 철학과 종교에서 구세주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인식이 하나님이 성경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믿음은 도리어 구유와 같이 천박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심플하고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요, 비윤리적이며 비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믿음의 도를 미련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비웃고 박해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11:25)

 

그러나 성탄 하신 존귀하신 구세주는 존귀한 곳에 존귀하게 계시지 않고 천한 구유에 낮고 천하게 계시는 것 같이 예수는 사람이 숭상하는 선행이나 철학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도 낮게 여기고 멸시하는 구유같이 소박한 믿음에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의 높고 귀한 곳을 버리고 낮고 천한 베들레헴의 구유로 나올 때 예수님을 만나났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세상이 고귀하게 아는 것을 버리고 세상이 낮고 천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믿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나의 의나, 선행이나, 지혜와 지식을 포기하고 세상이 낮고 천하게 여기는 믿음으로 오십시오.

 

사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높고 큰 것이나 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구유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과 같이 행복은 구유와 같이 소박한데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크고 화려하고, 거창하고 높은 곳에 있는 줄 알아서 행복을 찾아 산을 넘어 가지만 눈물 함빡 젖어 돌아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도라는 것도 지고하고 심오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선행이나, 철학이나 종교의 고상을 떠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유와 같이 여기는 낮고 천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믿음으로 오기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 구세주를 만나시고 이제부터 좋은 소식이 있는 인생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거기서 참된 인생의 보화를 만날 것입니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만날 줄로 믿습니다.

 

둘째 믿음은 내가 구유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당신이 구유와 같이 되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시기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빌2:6-8절 말씀과 같이 자기를 비워서 낮추었습니다. 당신이 친히 구유가 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이 왕궁이 어울리겠습니까? 구유가 어울리지요. 그래서 구유로 오셨습니다. 구세주 예수는 이 낮고 천한 구유에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우시고 낮아져 구유에 계신 예수를 만나고 모시려면 당연히 우리도 낮고 천한 구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빈 구유가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예화가 있지요. 어느 장엄한 교회 계단에 흑인이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어서 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 나도 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단다. 실제로 제가 목사인데도 이렇게 결국은 들어갔지만 못 들어 간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높고 교만하면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는 내가 너무 높아서 오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보다 잘나고, 내가 예수보다 의롭고, 내가 예수보다 지혜롭고 고상해서 고상을 떨고 고귀해서 고귀를 떨면 구세주 예수는 모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구유처럼 천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다고 하는 게 믿음이요, 나를 능력 있게 아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는 것이 구유가 되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는 높고 귀한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낮고 천한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 마음의 구유를 비우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구유를 치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교만을 비우고 치웁시다. 우리마음의 더러운 죄와 허물을 구유를 청소하듯 청소합시다. 이렇게 믿음으로 낮은 구유, 비워진 구유, 청소한 구유가 되어 목자와 같이 구세주를 보게 되시고 경배하고 모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내가 구유가 되면 거기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거시서 주세주가 나시고, 거기서 강보에 쌓여 누이십니다. 그 예수가 SAVIOR,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하게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 가도록만 구원하는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구원자, 해결자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속한 백성을 그냥 고아와 같이 세상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생활에서 구세주가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구약의 성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48:15,16)

 

이것은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이 되었을 때에 고후1:10그가 이와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15:30,31나를 위하여 빌어 나로 유대의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 받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죄 사함의 구원만 믿은 것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에서도 구원해주시 것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고후11:23-27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딤후4:17-18같이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바울에게 보호도 되고, 건강도 되시고, 양식도 되시고, 능력도 되시고 안전도 되셨습니다. 이 예수의 구세주 되심으로 좋은 소식이 있는 사람이 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삶을 누렸습니다. 이게 구세주 예수를 만나고 모신 결과입니다. 이걸 성경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이렇게 전인적입니다.

 

나는 이래서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이 예수로 제게 좋은 소식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믿음이란 구유로 갑시다. 구유가 됩시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른 사람의 구세주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구세주가 되시어 좋은 소식이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성탄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