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은 모란이 지는 5월을 봄을 여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읊었습니다. 미문으로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은 오월을 “스물 한 살처럼 싱그럽고 하얀 손가락에 비취가락지” 같다고 예찬하며 “스물 한 살 오월에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가서 모래위에 사랑으로 얻는 고통과 버리는 고통을 쓰고 죽지 않고 살아왔다”고 낭만을 노래했습니다.
찬란한 햇살, 따뜻하고 부드러운 대기, 드러눕고 싶은 부드러운 풀밭, 실록이 빛나는 숲 속에 울리는 새들의 노래, 라일락 향기와 장미가 몽우리 지는 오월. 계절의 여왕, 이것이 오월의 이미지요 오월의 찬가들 일겁니다. 눈까지 밝아지는 신록이 가슴을 연두 빛으로 물들이는 오월의 찬란한 낮도 설레게 하지만, 해지고 어두워진 향기로운 5월의 밤에 나서면 훈풍이 온몸을 포근히 감싸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온 아카시아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마치 젓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음 같이 평온하고 사랑 받는 느낌이지요.
그러나 이 싱그럽고 찬란한 오월의 하늘아래 부르는 노래가 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슴에 피가 끓게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비분강개하고 좌절하고 통곡하는 오월의 노래도 여기저기 울립니다. 5,16에서 5,18로 이어지는 이 땅의 비민주적 어둠과 폭압의 역사는 이 찬란한 오월을 “잔인한 오월”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오월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고, 분노와 슬픔과 고통의 오월의 노래가 그친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히려 잔인한 오월을 만든 이들에게 향수를 느끼고, 민주적 가치가 근본적으로 위협 받는 일에도 별 저항이 없는 형편입니다. 민주적 가치를 지키기 보다는 “오늘의 주가”를 더욱 염려하는 우리는 잔인한 오월의 노래를 낭만 넘치는 오월의 노래로 변화시킬 소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민의식은 오늘의 사회적 병리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조국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천국시민의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작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신정국의 시금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꽃이 지는 오월은 열매가 맺는 달임을 기억합시다. 오월에 진 꽃에서 공의의 열매가 익어 잔인한 오월의 노래가 사랑과 낭만의 노래가 되도록 성실한 시민사회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자녀들만은 잔인한 오월을 노래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험해지는 남북관계를 볼 때. 저는 더욱 이것이 오늘을 사는 시민사회의 성도로서 오월을 맞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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