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강 해/주기도문 강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브라함-la 2024. 3. 24. 12:45

024,2,28 주일

본문 : 마6:9-13

말씀 : 라인권목사

 

오늘부터 사순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이번 사순절에 구속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여 힘있게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주기도문 송영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송영doxology,誦詠이란 시가(詩歌)를 외어서 그 뜻을 새기면서 나직이 읊조리는 노래입니다. 따라서 이 주기도문의 송영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도 하나님께 있기 때문임을 마음에 새기고 고요히 하나님을 찬송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주기도문의 이 송영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난하 주를 보면 ”고대 사본에는 이 괄호 안의 구절이 없음“이라는 주가 붙어 있습니다. 이 고대 사본은 4세기의 사해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말합니다. 고대 사본에 없고,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이 구절은 없습니다.(눅11:1-4)그래서 이 구절을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고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이런 논란 때문에 지금 우리 성경에는 전에 있었던 ”대개“라는 말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받아야

첫째는 지금 성경은 원본은 없고 사본만 있습니다. 고대 사본에 없다는 것이 반드시 원본에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고대 사본에 없지만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나, 8세기의 레기우스 사본에는 있습니다. 사본은 후기의 것일수록 가필의 경향이 있어서 고대 사본을 더 권위 있게 보는 겁니다. 셋째, 기도에서 송영은 성경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모든 자재들을 드리고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1-12)고 장엄하게 찬양했습니다. 즉 주기도문의 송영은 새로운 창작이 아닌 성경을 따른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고 찬양하고,(롬11:36) 계4:11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렇게 송영은 성경의 전통입니다.

 

넷째, 따라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이 송영을 사용하셨음을 주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는 증거합니다.(요17:1,4,5) 뿐만 아니라, 이 주기도문은 모범기도의 문자적인 폼이 아닌, 정신적인 폼입니다. 그래서 이 송영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주기도문의 송영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기도문의  송영이 가르치는 것

먼저 이 주기도문의 송영은 기도자의 관심과 눈을 땅에서 하늘을 향하게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는 기도를 시작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로 올려줍니다. 이게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이렇게 우리 영을 고양시킵니다. 이렇게 영이 하늘에 있지만, 여기서 주님은 하늘에 있는 영을 다시 끌어 내려 이 현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현실은 먹고 사는 게 걱정이며, 마음과 달리 죄에 빠지고 시험 풍파가 가득한 곳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현실은 이렇게 절실하고 절박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현실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이걸 알아 주십니다. 이 현재적인 문제들로 걱정 금심에 쌓여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공급이 되시고, 용서가 되시고 보호가 되게 하신 다는 겁니다. 기도로 현재적 문제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신 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염세적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 양식, 용서, 보호를 구하다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물질과 육신에 몰입됩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가시 떨기 같이 모든 관심이 여기에 있고, 모든 힘을 다 여기에 쏟아 하나님과 하늘의 일, 영에 잃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잃습니다. 천국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다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고 우리의 관심이 물질과 자기 필요와 땅의 일에서 다시 하늘을 향하게 합니다. 이게 이 송영의 역할입니다. 물질과 세상일 자기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데서 하늘을 향하게 합니다. 우리 소원과 목적이 하늘에 있게 합니다, 땅엣 것을 목적으로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엣것을 목적으로 땅에 것을 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현실적 필요를 기도하면서도 하늘을 봅시다. 그래서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라는 하늘의 것을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응답이 기도의 정점이 아니다

둘째, 이 주기도문의 송영은 기도는 응답이 기도의 정점이 아니라, 더 높은 기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 송영을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응답이 기도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이때 신앙은 상업적인 것이 됩니다. 응답이 전부라면 기독교와 이 종교의 차이가 없습니다. 소원 성취하는 건, 꼭 우리 기독교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종교도 기도로 이적적인 경험도 합니다.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수태도 합니다. 소원 성취, 응답이 기도의 정점 목적이면 기도는 사람이 신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신을 내가 써먹는 것에 불과합니다, 응답을 기도의 목적, 정점으로 알면 기독교나 무속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에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시몬이라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따르게 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래서 시몬은 자기를 자칭 큰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온 성이 큰 기쁨이 임하고 빌립을 따르자 마술사 시몬도 믿고 세례 받고 빌립을 따라 다니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기도로 성령 받게 하는 것을 보고 시몬이 돈을 내고 안수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이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권능 받아 사도들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베드로는 악독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다고 했습니다.(행8:9-23) 즉 시몬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소원 성취, 응답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섬겨서 자기가 높아지고 광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다는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응답이 목적이어서 소나무 뽑으며 기도하여 응답으로 능력 받는 은사자들이 타락하는 겁니다. 자기가 중심, 정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송영은 이점을 지적합니다. 기도가 응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게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이렇게 더 높은 경지로 나게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응답이 목적, 정점이 아닙니다. 기도는 응답보다 더 높고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구하라고 하셨습니까? 송영은 단지 응답을 감사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왜 기도하라고 하시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지를 깊이 묵상하여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도와 이 송영이 지향하는 것은 것은 무엇입니까?

 

송영이 지향하는 기도의 수준

첫째, 기도는 기도와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내가 내 문제로 하나님 앞에 나가 고하게 하고, 이 고함이 하나님이 ’알았다, 내가 해결하마‘ 이렇게 하나님과 내가 교통하는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 관계가 깊어지게 하고, 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행복을 바울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다고 했고,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이렇게 주님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쁨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원하셨고, 우리 관계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제 손녀 다윤이가 이제 할아비와 대화를 합니다. 할아버지 놀러 오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딸이 이 기쁨을 주려고 매일 밤8시에 영통을 시켜 줍니다. 그 시간에 모든 시름이 다 풀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기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 아시는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이 기진하기까지 기도하게 하신다고 한 겁니다. 이렇게 기도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으면 끝입니다. 이 관계에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시다. 하나님과의 교통, 교제 관계를 기도의 정점으로 삼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수준까지 기도하시고, 이 기도가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직분자는 이 기도가 있는 사람이요, 이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은혜로 교회 직분자가 이 수준의 기도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기도는 이 교제와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 사람을 구속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데 이르게 하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당신을 알아가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이 피조 세계와 역사와 사건과 존재요, 예배와 기도입니다. 이것들로 하나님을 경험하여 마치 바다가 넘침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하신 것입니다,(사11:9) 이게 기도의 정점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고유명사에 일반 명사가 붙은 것은 다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여호와를 라파로 알ㅆ고, 기도할 때에 여호와를 닛시의 하나님의 알았습니다. 기도할 때에 여호와를 이레로 샬롬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시다. 기도와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데 이르는 기도자가 되시고, 직분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이렇게 기도로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즉 믿음과 경외가 향상합니다. 즉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을 현재적 구원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큰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한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히시는 지혜와 권능에 압도됩니다. 나라도 권세도, 영광도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하나님 한분이면 충분함을 알게 됩니다. 이 지식이 큰산 앞에서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큰 믿음이 되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게 됩니다.

 

경외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되심에 압도 된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은 이 경외, 즉 하나님께 압도된 반응입니다. 응답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만나 그 하나님께 압도되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고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는데 이르는 겁니다. 이게 기도의 정점입니다. 우리 기도가 응답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뢰와 경외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도로 이 큰 믿음과 예배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기도는 이 관계와 앎과 경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장하고, 성화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지란지교라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만큼 하나님을 닮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닯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하나님을 큰 바위 얼굴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아들의 형상에 이르게 합니다. 이게 기도의 정점입니다. 그래서 이름 앞에 거룩 성자가 붙는 사람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이 성화가 이 송영에 이르게 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내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아들의 형상을 이룸을 볼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경배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게 천국이 찬송이 넘치는 까닭입니다. 재림 날에 뭇 성도가 변화하여 주님의 형상이 된 것을 볼 때 그 찬송이 넘칩니다. 아들의 형상에 이르는 것, 여기가 우리 기독교의 기도가 지향하는 기도의 수준입니다.

 

지금 우리 기도의 수준이 어떻습니까? 방송에 나와 간증하는 이들 대부분이 응답을 간증하고, 응답하신 하나님을 간증하지, 기도로 어떻게 하나님과 깊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고, 하나님께 압도되고. 자기가 변하고, 성장해 예수처럼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새벽기도하고, 금식 기도해도 열을 냅니다. 기도해도 자기가 안된 겁니다. 문제 해결하고, 능력 받으려고 소나무 뽑았지, 예수님 같은 사람 되려고 소나무 뽑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주기도문의 송영 앞에서 내가 기도의 수준을 성찰합시다. 이 송영으로 응답을 넘어서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고, 경외하는 예배가 깊어지고, 하나님 아들의 형상에 이르는 기도가 되게 합시다. 이 형상에 이르게 기도합시다. 이것이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여기서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가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취임하시는 권사님과 우리 모든 직분자가 이 경지의 직분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