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6,19, -
본문 : 마13:9,10,23
말씀 : 라인권목사
지난 주일까지 말씀이 나가서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 세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이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경우 다 같이 깨닫지 못하여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는 양태가 서로 다르게 길가, 돌밭, 가시떨기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말씀을 들은 자이고, 교회생활하고 기쁨도 있지만 말씀이 나가는 목적인 구원과 천국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천국의 말씀이 나가서 결실하는 경우, 즉 말씀이 나가는 목적대로 결실하는 경우를 공부할 차례입니다. 사실 결실하는 경우는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에서 이미 말씀 드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어려움이 닥치면 뚫고 나가지 못 하지만 듣고 깨달은 사람은 어려움을 뚫고 나가서 결실한다, 이렇게 결실하는 경우를 매번 사례별로 긍정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산발적이기 때문에 말씀이 나가서 결실하는 경우를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말씀이 나가서 말씀의 목적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좋은 땅에 떨어지매”라고 좋은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사람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고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공부할 것은 이 좋은 땅에 떨어진 사람이 어떤 사람을 의미 하느냐 입니다. 이것을 마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 떨기나 결실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말씀을 듣기는 듣고 심지어 기쁨으로 받지만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해서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실하는 사람은 구속과 믿음의 도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을 마음으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말씀의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고, 듣는 이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깨달음 득도인가
그러나 이렇게 좋은 땅에 떨어진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깨닫는다고 할 때 자기가 깨달음을 믿는다는 것과 믿음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종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기도하는 중에, 또는 공부하는 중에 깨달았다며 그 깨달은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 종교는 그 창시자나 교주가 깨달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세상 종교는 인간의 사유의 결과물,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창작, 인간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기반으로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주관적인 자기 생각이나 경험을 믿음으로 내세우는 것은 이단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원파는 깨달은 자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즉 구원파는 구원을 믿음에 두지 않고 깨달음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에 구원이 있게 하는 것은 불교와 똑같습니다. 불교는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득도”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득도,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를 전인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깨닫는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첫째, 말씀을 깨닫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전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확신을 말합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세 가지 경우와 밭에 감추인 보화나 진주비유와 대조해보면 분명해집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 알아본 사람은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보화를 삽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은 전인적이고, 전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확신입니다. 사람은 확실히 알고 확신하면 그것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행하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구원과 천국을 깨달은 사람은 말씀을 인한 환난이나 삶의 위기가 와도 이기고 나갑니다. 뚫고 나갑니다. 그러나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의 사람은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지만 마치 수학공식과 같이 알았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했습니다. 마음으로 깊이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실제는 하나님과 천국을 모릅니다. 그래서 환난이 오고 삶에 위기가 닥치면 뚫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전인적으로 깨달아 믿고 확신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깨닫는 것은 중심, 즉 마음에 받아드린다는 뜻입니다. 막4:20절을 봅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라고 했습니다. 깨닫는 것은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말씀이 머리나, 감정이나, 의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내려오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체국을 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권사이고, 자녀들도 다 잘 믿는데 아버지 우체국장만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교회 나오게 되고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목사님이 내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마음에 확실하게 믿어지냐고 확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분이 알기는 아는데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음에 믿어지면 받으시라고 세례를 연기했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두 번을 연기하고 세 번째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머리, 지식에서 가슴 마음으로 들어오고 내려오는데 삼년이 걸린 것입니다. 머리, 지식에서 마음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감정에서 마음에 내려와야 하고, 의지 발에서 마음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깨달음입니다.
받아드린다는 것을 다른 말로하면 약을 투약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병통치 신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약을 몸에 투약해야만 몸 안에 들어가야 약효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은 말씀을 마음에 받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이 몸에 들어가 약효를 발휘하는 것 같이 말씀이 마음 들어가서 확실하게 깨달아져서 내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아 드림은 전적인 시인과 찬동, 승복이요, 전적인 수락이요, 전적인 의탁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셋째,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발견이거나 각성이나 결단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진리의 영감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노력과 지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말씀은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즉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 자체도 이게 영, 즉 신령한 것입니다. 영에 속한 영의 일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압니다.(고전2:13)이 신령한 것을 사람의 지혜와 능력, 즉 육신으로는 알 수가 없고 도리어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다.(고전2:14)
니고데모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이까”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다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3:3-9)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천국의 일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완전 생퉁이 입니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육에 속했기 때문에 그의 이스라엘 선생으로 지식이나 능력으로도 구도로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깨닫는 것은 사람의 구도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진리를 우리 영에 감동할 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고전2:1) “내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요리문답 해설을 쓴 월리암슨은 어두운 심령에 빛이 들어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어두운 영에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방안의 사물을 다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께서 빛으로 심령에 오시면 말씀이 들립니다.(살전2:13) 빛 가운데 빛을 보는 것입니다.(시36:9)문자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됩니다. 소리가 아니라 음성이 됩니다. 즉 죄와 구속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천국의 일이 깨달아지고 믿어져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깨닫습니다. 믿게 됩니다. 구원 받고 구원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고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진리에 감동하여 영으로 깨닫고 확신한 사람은 말씀이 목적대로 됩니다. 어려움이 오고 위기가 와도 뚫고 나가 삼십 배가 되는 경우도 있고 육십 배가 되는 경우도 있고 백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영이 성령과 진리의 감동과 영감의 역사에 감동되고 영감 된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대로 벼락 맞은 것 같습니다.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이 성령과 진리에 감동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때까지 가지고 놀던(?) 말씀이 가지고 놀던 폭탄이 폭발하듯 말씀이 폭발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폭탄의 뇌관에 임하여 말씀이 터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인간의 교만이 깨집니다. 사람의 생각이 깨집니다. 자기가 깨집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믿음만 살길로 알고 말씀을 붙잡고 갑니다. 어려움이 오면 뚫고 나가는 착하고 좋은 사람, 깨달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를 만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1:6을 보세요,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골1: 27절에 이 비밀은 너희안의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면 다 알게 되는 것 같이, 우리 영에 예수가 오시고 예수를 만나면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그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와 형벌을 받을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소망과 영광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매를 맺고 자라게 하고 기쁨과 견딤과 오래 참음과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닫는 착하고 좋은 마음의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이 은혜를 주시도록 성령께로 갑시다. 이 은혜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말씀이 나가는 목적대로 되는 이 천국의 양태가 나타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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