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6, 25, 주일강론
본문 : 마13:8,9,23
말씀 : 라인권목사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여부에 결실이 달려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에 따라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말씀이 결실하는 데는 요구되는 마음씨와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에 대한 주님의 해석을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마태는 듣고 깨달아 순종함으로 결실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받아드려 순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여기에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말씀을 듣고 깨달음에 요구되는 마음씨와 말씀을 지키는데 요구되는 마음가짐, 또는 태도를 강조하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우선 결실하려면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말씀을 받아 깨달으려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마음씨가 있어야 한다는 것 강조합니다. 이 마음씨를 누가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말씀을 받고 깨닫는데 요구되는 착하고 좋은 마음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를 실제적으로 대비해서 보여주는 말씀이 마11:25-26절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치 않고 주님을 배척 할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 주님은 “이것을”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셨습니다. “이것을” 즉 주님이 메시야이신 것과 주님이 오심으로 천국이 임했다는 것- 복음을 스스로 지혜 있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는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지혜롭다는 것은 쉽게 말 하면 이미 충분히 알만큼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자는 그래서 자신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전자가 율법을 안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스스로 이스라엘의 선생과 재판장으로 여기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장로 제사장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아는 자로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하고 도리어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악심입니다. 이것을 완악하고 완고하다고 합니다. 이 악심이 진리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행7:57,딤후4:3,4) 말씀 앞에서 이 악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천국을 숨겨서 비밀로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도리어 심판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이 악심을 품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히3:12)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이와 반대로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당연히 가르침을 받을 사람으로 알고 가르침을 받고 순종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앞에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고 귀를 기우려 들고 순종할 태세 마음씨로 말씀 앞에 섰습니다. 이것이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서 이 착하고 좋은 마음씨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천국을 나타내시는 방법이 최면을 걸거나, 권능을 과시해서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 말씀을 대하는 마음씨. 태도에 영원한 운명의 사활이 걸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 앞에서 착하고 좋은 마음씨를 가지시를 바랍니다. 이 마음씨로 지혜 있고 슬기롭게 여기는 자기와 악심을 부인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착하고 좋은 마음씨로 말씀 앞에 섭시다. 이 착한 마음씨에만 말씀이 들어갑니다.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말씀이 믿어집니다. 순종하게 하여 말씀이 결실하는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착하고 좋은 마음씨로 서시므로 더욱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아서 깨닫는데 착하고 좋은 마음씨가 필요하듯 깨달은 말씀이 결실하도록 지키는데도 합당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마음가짐으로서 착하고 좋은 마음씨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착하고 좋은 마음가짐
이 마음씨를 누가는 “인내로”결실하는 자요라고 인내라고 했습니다. 이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은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의 양태들을 대조해보면 분명해집니다. 왜 길가와 같은 사람은 자기라는 교만을 이기지 못했습니까? 자기를 인내하지 못한 겁니다. 왜 돌밭과 가시떨기의 사람이 결실하지 못했습니까? 말씀을 받았지만 말씀이 결실하도록 지키는 마음가짐, 즉 인내가 없어서 시험과 어려움을 뚫고나가지 못하고 막혀 버렸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그 말씀이 결실하도록 지키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켜나가려면 인내라는 마음가짐이 있어야합니다. 결실하려면 말씀을 지키는 인내라는 마음씨. 마음가짐이 긴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인내라는 마음가짐이 긴요합니까? 좋은 땅에 떨어져 결실하는 사람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 악한 마음씨가 없을까요? 좋은 땅에 떨어진 사람, 깨달은 사람도, 동일한 인간입니다. 동일한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의 근성도 있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유혹, 환난, 위기 시험 이것이 깨달은 사람에게는 면제되었습니까? 결실하는 사람도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어려움과 시련과 시험, 걱정 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육체입니다. 다 같이 약합니다. 그래서 똑 같은 환경에서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실하려면 이렇게 같은 인간성, 같은 환경, 같은 경험을 당할 때에 깨닫는 자는 그 어려움을 뚫고 가는 인내라는 마음가짐이 요긴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는 인내가 나타나지 않고 결실하는 경우는 인내가 나와서 어려움을 뚫고 나가게 합니까? 그것은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입니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과 천국의 일을 깨달고 그 가치를 알면 어떤 대가도 지불하는 인내가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을 깨달은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롬8:24,25절을 봅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하셨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주님이 함께 하실 소망, 부활의 소망,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하신 하나님, 죽어도 부활시켜 영광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이 삶의 필요를 돌보시지 않고, 어려움에서 구원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이 소망이 견고하게 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게 합니다. 환난을 인내로 참고 견디고 감사하게 하며 뚫고 나가 말씀대로 자라갑니다. 이 소망이 인내로 말씀을 받는 시험을 뚫고 나갑니다. 말씀을 지키는 어려움을 뚫고 나갑니다. 말씀을 깨달은 이는 착하고 좋은 마음, 인내라는 덕성이 어려움과 위기에 나타나서 말씀이 목적을 이루어 결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시금석입니다. 말씀 앞에서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 나오느냐? 말씀을 지키는데 이 착하고 좋은 마음씨가 발휘되느냐가 내게 천국이 있는 증거입니다. 말씀 앞에서, 말씀을 지키는 일에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거듭나야 합니다. 이 신앙의 덕성이 역사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덕성이 나와서 더욱 말씀을 깊이 깨닫고 순종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 이 신앙의 덕성이 본래적인 것이냐 아니면 은혜로 되는 새로운 덕성이냐는 것입니다.
본래적이냐 새로운 은혜의 덕성인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 문제가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듣고 깨달았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한대로 성령과 진리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고 좋은 마음은 타고난 덕성이 아니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된 새로운 덕성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루디아의 경우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16:14) 그리고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살전2:13) 이것이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된 것을 바울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살전1:4-6) 이 결과 말씀이 믿는 자속에서 역사하고 달려서 결실한 것을 보고, 이것이 그들이 택함 받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착하고 좋은 마음, 가르침 받는 마음 지키는 마음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악하고 완악한 마음을 기경하여 착하고 좋은 마음이 되게 하여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내로 지켜 순종하여 결실하는데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겔36:26,27이 이런 뜻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셔서 새 마음을 주십니다.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이 영으로 말씀이 심령에 새겨져서 순종하는 것이 본성이 되게 하십니다. 이 성령이 우리 마음을 기경해서 착하고 좋은 새 마음을 주셔서 깨닫고 인내 하게 합니다. 이 은혜로 새 마음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마음을 기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드럽고 순종하는 새 마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깨달은 사람은 이 은혜로 된 덕성이 발휘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은혜로 된 덕성을 사용하는 것, 써나가는 것, 써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덕성을 쓰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이 써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덕성이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적으로 착하고 좋은 마음을 발동하고.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켜나가는 인내가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좋음 마음이 발휘되는 것이 깨달은 증거요, 은혜의 증거요, 천국이 임한 양태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된 것이 이 양태로 발휘되어 나타나므로 성화되어 가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결실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덕성이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은혜로 가족 여러분! 착하고 좋은 마음은 말씀 앞에서 가르침을 받으려는 착한 마음씨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말씀을 지키는 인내하는 마음가짐, 마음씨입니다. 이 착하고 좋은 마음, 신앙의 덕성이 나타나도록 성령께로 갑시다. 성령이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은혜로 된 착하고 좋은 마음을 말씀 듣는 일과 지키는데 믿음으로 발휘하고, 사용하여 더욱 말씀을 깊이 깨달아 가시고, 더욱 힘 있게 인내로 말씀을 지켜 나가 말씀이 목적하는 데로 구원의 충만한데 까지 자라가고 결실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결실이 최소한 삼십 배, 최대 백배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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