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행/길에서 줍는 진주

뱃 멀미의 추억도 새로운 흑산도

아브라함-la 2019. 10. 25. 00:06

 

흑산도!

다도해 2,300여개의 섬 중의 하나로,

홍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팔 개 지구로 구획된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흑산 홍도지구에 속한

우리나라 최 서남단에 자리한 섬이지요.

 

이런 연유로 이 흑산도에 어업전진기지를 두고 있고

소흑산도로 불리우는 가거도에서는

중국의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대지요. 

 

흑산도는 이 땅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섬의 풍광보다

국민가수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

그리고 이곳의 홍어가 더 유명한 섬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 섬은 여행자들에게는

홍도를 가는 거점 정도의 지역이었습니다.

 

 

 이 섬을 黑山島라고 부르는 것은

 이 흑산의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어서라는 측과

 이 섬의 산이 검게 보여서 흑산도라 부른다지만,

 바닷 빛이 검어서라는 쪽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멀리 우뚝한 산은 다 검게 보일 뿐만 아니라,

 이 섬이 서남단  가장 먼 바다여서

 그만큼 깊은 바다이므로

                                                      물 빛이 검푸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80년후반에 

이 흑산도에 발을 내린 것도 

홍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시절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와도

서울에서 출발해 목포에 도착하면

이미 오후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홍도를 가려면 흑산도에서

일박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책으로만 읽던 이 흑산도에

설레이는 가슴으로 첫 발을 내릴 때,

예리항은 이미 저물고 있었습니다

부두가의 어느 식당에 저녁식사를 끝내자

허름한 여관의 숙소를 배정받았지요.

숙소를 배정이 끝나자 숙박 지침을 안내했는데요.

샤워를 한꺼번에 하지 말고 윗층부터 차례로 하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물이 끊어지니

사용시간을 지켜 달라는 거였습니다.

그 시절 흑산도의 물사정이 이렇게 좋지않았습니다.

이런 흑산도에 이제 공항이 들어선다네요.

 

 

이런 물 사정에 어찌 어찌 샤워를 마치자

삼,사년 선배목사 몇분이 저를 불러냈습니다.

바다낚시를 가자구요.

항구에서 배 한척을 빌려서 어두운 바다로 나갔습니다.

항만을 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닻을 내리고

선주가 나누어 준 줄 낚시로 낚시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배는 곧장 너울거리고 

뱃 멀미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기색을 않고 낚시에 전념했지요. 

때문에 선배들이 비싼 돈낸

낚시를 포기하게 할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멀미는 점점 심해지고

거기에다 낚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일행 중에 한 분만 우럭 한 마리를 건졌을 뿐 입니다.

결국 제가 뱃 멀미로 신고하는 것을

본 일행은 낚시를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제가 어찌 미안하던지요.

 

이렇게 저물무렵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먹고 훌쩍 홍도로 떠났던

이 흑산도를 이번에는  

홍도에서 일박하고, 흑산도로 왔습니다.

30여년만에 다시 찾은

이섬도 상전벽해였습니다.

예리항은 현대적 방파제를 둘러

만 전체가 항구가 되었고,

섬을 일주하는 관광도로는

새로운 명소를 창출했고

제법 큰 규모의 호텔도 있어

흑산도 관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흑산도는 더 이상 홍도를 가는

경유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야 비로소

이 흑산도의 풍광도 빼어나다는 걸 알았습니다.

홍도의 풍광이  본섬에 치중해 있다면

흑산도는 망망대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섬들이

여백의 미를 가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찍어도

괜찮은 사진이 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촛대바위는 홍도에서도 유비를 찾을 수 없는 

군계일학같은 풍광를 뽐내는

흑산도의 보배라 할 것입니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선 등성이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에

노을이 물드는 풍광에 젖어 있다가

지금 저와 같이 외로운 이 섬의 낙조를 지켜보았을

조선의 선비 정약전과

   최익현이 생각이 났습니다.

 

묘하게 호에 같은 庵자를 쓴 정약전과 최익현은

귀양살이도 같은 곳인 이 흑산도에서 했습니다.

손암巽庵은 조선의 마지막 별 정조 때 신유박해로,

면암勉庵은 그 조선이 망한 을사늑약에

도끼 상소로 이 흑산도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손암은 이 섬 15년 유형의 아픔으로 

                                                저 자산어보를 썼고

면암은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글귀를 이 섬에 남겼습니다.

 

면암 같이 곧은 지사가,

그것도 망국의 시절에 청나라도 망하는 걸 보면서도 

이런 사대적인 글을 조국의 돌에 새긴 건 ,

쉬이 납득이 안 됩니다. 

일본에 대한 저항 심리에서 였을까요?

그리고 약전은 이 외로운 섬의 낙조를 보다

이 땅의 민초들 생각에

자산어보를 집필 했을까요?

 

 저녁 빛 물들어 가는 흑산의 바다에서

나는 내 인생의 바다에 

물들기 시작한 노을을 보았습니다.

이런 감회가 이 섬을 처음 찾던 밤

 뱃 멀미도  새롭게 했을 겁니다.

 

    이리도 소년이 노인되기는 쉬운데

이제 내 인생의 노을 빛으로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이제 이 절해고도의 유배의 섬에

공항이 들어서 하늘길이 열리는 날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의

그리움은 해소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