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날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행은 우리에게 그 어두운 시절을 어떻게 헤쳐 나올 수가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인생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때를 살아가는 인생의 지혜를 깨닫는 소중한 경험을 가지게 합니다.
지난 주간 제주에서 동창회 수양회를 마치고 성읍2리의 작은집을 갔습니다. 동생이 근처에 ‘백약이 오름’이 있는데 한번 가자고 해서 다음날 새벽에 백약이 오름을 갔습니다. 이 오름을 ‘백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 각종 약초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백약이 오름의 매력은 분화구와 그 전망입니다. 3,124m의 백약이 분화구는 산굼부리분화구 보다 1천 미터 이상 클 뿐만이 아니라. 평지 분화구인 삼굼부리와 달리 356메타가 넘는 오름에 분화구가 있어서 분화구와 함께 성산 일출봉과 제주 동부의 아름다운 전망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백약이 오름은 성읍2리 주민들의 공동방목장입니다. 우리가 갔을 때 주민들이 모여서 진드기 방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출발할 때 비가 올 것 같더니 백약이 오름의 밑에 이르자 빗낱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른 백약이 오름의 정상은 안개가 짙게 끼어서 분화구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모든 전망이 안개에 쌓여 있었습니다. 노루가 많다고 해서 혹시 노루를 볼 수 있을까 분화구의 잔솔밭을 살펴보았으나 노루를 보는 행운은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백약이 오름에서 볼수 있다는, 성산 일출봉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가 없는 것도 아쉬웠지만, 실로 오랜만에 비를 맞으며 오름의 부드러운 잔디 길을 걷는 것은 특별한 정취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 이후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오롯이 비를 맞으며 여유롭게 빗속을 걸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오름의 정상을 덮고 흐르는 축축한 신비로운 안개, 안개속의 고요함, 볼을 때리는 빗방울의 청량함, 바다 내음이 나는 듯한 오름의 맛있는 공기, 발아래 밟히는 비에 젖은 잔디 길의 부드러운 촉감!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정취를 즐기는데 굵어진 빗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쏟아지는 비에 서둘러서 분화구를 돌다가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짙은 안개로 시야는 불과 십 메타도 채 안됐습니다. 시야가 이렇게 짧으니 둥근 분화구를 도는 데도 눈앞에 보이는 길은 항상 곧았습니다. 궁근 분화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직진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야할 앞길은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시야에 트인 길을 그냥 걸으면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 느낌이 드는 순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던 시절이 떠올랐고, 그 어두운 시절을 지금 비안개 속의 백약이 오름을 걷는 방식으로 헤쳐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안개로 앞을 내다 볼 수는 없어도 안개 속에 길은 있고, 시야에 보이는 길을 따라 직진하면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가게 되고, 목적지에 도달하듯, 앞날도 앞길도 보이지 않던 시절에 현재 직면한 일을 해나갔을 뿐이지만, 결국 문제는 해결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회상을 하며 앞을 내다볼 수없는 안개 속에서 눈에 보이는 곧은 길을 직진하다 보니 올라온 원점에 도착해서 다시 오름을 내려 왔습니다.
우리 인생의 날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환난 날의 한가운데서는 내일을 가름 할 수도 없고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없는 것이 사람을 막막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좌절하고 방황합니다. 염려와 근심에 싸여 길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이것이 안개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헤메이다 도리어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이 환난 속에서 제 길을 잃게 하고 난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속의 인생의 날을 돌파하고 헤쳐 나가는 지혜는 안개속 백약이 오름의 분화구를 도는 것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안개로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안개 속에 길은 있듯, 환난 속에도 길도 있습니다. 안개로 전망이 가려있지만, 시야에 보이는 길로 직진하면 오름의 분화구를 한 바퀴를 도는 것 같이 환난속에서도 자신이 가야할 자기 길을 가고, 현재 당면한 자기 일을 해나가면 결국 문제는 해결 되고 소원하는 인생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는 성경 말씀도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돌아보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시절에 직면한 현실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을 뿐인데 문제는 해결되고 원하는 삶의 자리에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앞날이 보이지 않는 날에는 염려하고 방황할 것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해나가고. 지금 가야할 자기 길을 직진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안개 낀 인생의 날에는 단순하게 직면한 길을 가고 직면한 일을 해나가는 것이 인생의 비결임일 것입니다. 이것이 비안개 속의 백약이 오름의 분화구를 걸으며 새삼 깨달은 인생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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